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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레드릭 Sep 25. 2021

유서를 쓰다

나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한다.

*새벽 5시 : 수영 또는 산책

*새벽 6시 : 아침 식사 준비

 -토마토 주스(토마토 2~3개를 유기농 설탕, 얼음과 함께 믹서기에 넣고 갈 준비)

 -봉골레 파스타(올리브유, 마늘 편 썰기, 모시조개, 레드페퍼, 화이트 와인을 프라이팬에 넣고 볶을 준비)

 -샐러드(어린 야채, 양파, 토마토 썰어 발사믹 드레싱 준비)

*6시 30분 : 세수, 머리 감은 후 아토피 목욕물 받기

 -팔꿈치로 쟀을 때 따뜻한 온도, 유칼립투스 에센스 오일 3~4방울, 욕조 위 받침대 놓기

*6시 40분 : 봉골레 끓이기

 -모시조개 입 벌릴 때까지 봉골레 재료를 프라이팬에 볶아 끓이다가 잘 익은 파스타면 넣어 버무리기

*6시 55분 : 아들 깨우기

 -아킬레스건과 종아리 마사지, 홍삼과 사과 먹이기

*7시 : 아침 차리기

 -토마토 주스, 샐러드, 할라페뇨 곁들여서 욕조 받침대 위에 봉골레 파스타 서빙

 -세탁기 돌리기

*7시 30분 : 설거지 · 빨래 널기 · 아토피 목욕 뒷정리(욕조 물 빼기 · 샤워 커튼 정리 · 욕실 창 열어 환기) · 목욕 마친 아들 얼굴, 몸, 두피 연고 바르기

*7시 45분 : 아들 등교시키기 · 출근

*8시 : 학교 업무 시작

 - 노트북 켜고 업무 메신저 로그인(중요 일정이나 업무협조 메시지 확인), NEIS행정시스템 로그인(공문 처리 및 교사들에게 공지할 사항 확인), 수업시간과 업무 및 영어과 회의 확인     

*오후 6시 : 아들 저녁식사와 야자시간 확인(일찍 끝나는 때가 있다)

*밤 9시 50분 : 아들 하교 픽업 출발

*밤 10시 10분 : 아들 픽업 후 귀가

*밤 10시 25분 : 아들 아토피 목욕물 받기

-팔꿈치로 쟀을 때 따뜻한 온도, 유칼립투스 에센스 오일 3~4방울, 욕조 위 받침대 놓기

*밤 10시 50분 : 아들 아토피 목욕(욕조 받침대 위에 과일, 간식 놓기)

*밤 11시 10분 : 아토피 목욕 뒷정리(욕조 물 빼기 · 샤워 커튼 정리 · 욕실 창 열어 환기) · 목욕 마친 아들 얼굴, 몸, 두피 연고 바르기

*새벽 1시 : 야식 준비

*새벽 2시 : 야식 정리 및 설거지, 내일 아침 식사 재료 미리 손질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일과 속에서 달팽이처럼 느린 내 속도에 채찍질을 하며 학교 일정과 마감할 일들을 끝내면 아들을 픽업하러 갈 수 있다.

밤 10시, 야간자율학습 끝난 아들을 픽업하러 가는 길은 마치 어떤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가는 느낌이었다. 깜깜한 도로를 지나 아들 학교 정문에 들어서는 순간, 벚꽃나무길이 시작되는데 하얀 벚꽃잎이 조명을 켜놓은 것처럼 하늘하늘거리며 반짝반짝 까만 하늘을 밝히고 있다. 벚꽃길을 따라 본관 건물까지 올라가면 왼편에 벤치가 놓여 있는 야경 전망대가 나타나는데 이천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고요한 숲 한가운데 차분한 세상이 펼쳐진다. 달빛 아래 이따금 새소리가 고즈넉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이 세상을 초월한 시간이 펼쳐진다. 그런 곳에서 늦은 밤까지 공부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삭막한 대도시에서 가질 수 없는 정서의 기초를 형성해 줄 테니 부모로서 참 안심이 되었다. 미친 듯이 휘몰아친 하루가 언제 그랬냐는 듯, 봄햇살에 눈 녹듯 사그라들어 평안해질 때 아들이 야자를 마치고 나온다.


‘이러다 죽으면 어떡하지?’

고2말, 1년만 더 버티면 되는 고3을 앞두고 이런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야자 끝난 아들을 픽업해서 아토피 목욕을 시키고 연고를 발라주고 야식을 챙기고 새벽 2시쯤 소파에 잠시 앉았는데 내 체력이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휴직하고 싶었지만 휴직 명목으로 자녀 입시 뒷바라지는 없었다. 휴직하지 않고 1년 더 버틸 수 있을까? 만일을 대비하여 법적 서류나 실질적인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우리 집 두 남자를 위해 재산내역, 보석류, 보험증권, 상조회 연락처, 공무원연금공단 퇴직금, 금융권과 각종 사이트 비번을 출력하고 클리어 파일에 정리하면서 내 유서도 끼웠다. 클리어 파일을 안방 테이블 아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고 A4용지에 크게 <엄마 사망 시 확인>이라고 써붙였다. 두 남자에게 확인시켰더니 아들이 “엄마, 무섭게 왜 그래?”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남편도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학교를 그만두지 않으면 생명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설명했더니 아들이 앞으로 야식을 배달시켜서 먹겠단다.


내 유서 이후 아들의 새벽 공부를 보지 못하고 먼저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늦게까지 혼자 공부하고 혼자 야식 먹는 아들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하는 공부 내용을 엄마가 이해하기 불가능해졌으니 미련을 버리고 얼른 주무시는 게 도와주는 거라는 아들 말을 위안으로 삼았다. 고3 1년간 야식을 챙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입시 후 우리 부부는 폭삭 늙었다.

“그냥 학원 보낼 걸 그랬어. 엥겔계수 200 넘었잖아.
사교육 시켰으면 덜 늙었을까?”

폭삭 늙은 서로를 보고 할아범, 할멈 하면서 농담 아닌 농담을 던졌다. 3년 입시 뒷바라지로 우리 둘은 노인네처럼 매일 온몸이 아프고 쑤시고, 작은 소리에도 잠이 깨는 남편은 3년간 잠을 못 자서 전립선이 망가지고 과민성 방광염으로 3시간마다 깨서 화장실을 가니 잠을 또 못 자고 안압 상승으로 녹내장,  혈압 180, 대장용종, 치질 혈변으로 고생했다. 태생이 잠충이인 나는 새벽까지 잠을 참아야 했고 다음 날 아들 케어와 출근을 위해 일찍 일어나야 했다. 하루라도 긴장을 풀면 잠들어서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매일 정신 똑바로 차리고 긴장, 또 긴장을 하는 생활 후 집에 있다가 당장 뛰쳐나가지 않으면 죽을 거 같은 공황장애 증세가 생겼다. 답답하고 가슴이 조여와서 창 밖으로라도 당장 뛰어내려야 할 것 같은 이상 증세가 생겼다.

제대로 된 방법으로 대학을 보내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우리는 미처 상상도 못 했었다.


아들은 한국에서 가장 좋다는 서울대부터 차례대로 6곳에 수시 학종으로 지원했다. 어느 곳은 1차 서류에서 불합격, 어느 곳은 수능 최저를 맞추지 못했다. 공교육이면 충분할 줄 알았으나 대학입시에서는 아니었다. 경기도의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의 성적과 학교생활-생기부로는 충분치 못했던 것다.

우리가 너무 이상적이었구나….

후회와 자책이 몰아칠 때 가장 마지막으로 지원했던 중앙대학교 경제학부(학교장 추천 전형)에서 합격 소식이 왔다!

합격! 합격이다!



<에필로그>

우리 가족에겐 우리만의 세계가 있다.

영화 조커를 보고 빗 속을 뚫고 오던 차 안에서 첼로곡을 틀 때도,

중간고사 수학시험 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틀 때도,

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의 영화 1917,

새벽 3시까지 읽은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아도르노와 벤야민, 베토벤 소나타 32번-글렌 굴드 연주…

이런 것들이 우리 셋만의 세계이고 그 세계는 우리만의 시간과 공간이다.

순간순간, 매일매일 쌓아 올린 세계는 우리만의 성이 되었고 그 성의 견고함은 우리 내면의 단단한 유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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