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날이에요. 나는 우산 쓰는 걸 좋아하지만 비 오는 날 우산 쓰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이 아무리 무거워도 내려놓을 수 없고, 우산으로 콕콕 땅을 찍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잖아요. 내 옷이 젖으면 엄마가 걱정을 하시니까요.
“서희야, 옷이 젖으면 감기에 걸려. 감기에 걸리면 병원에 가야 해. 병원에 가면 주사도 맞을 수 있고 오랫동안 약을 먹어야 하잖아.”
“병원에 가야 해? 주사 맞아야 해?”
병원 가는 건 무섭지 않은데 주사라는 말은 조금 겁이 나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건 “서희가 감기에 걸리면 엄마가 불편해.”의 다른 말 같아요. 뭔가 아주 귀찮은 물건이 내 몸에 꽁꽁 묶여 있는 기분이 드는 것보다 콧물이 나서 일주일에 2~3번씩 3주 이상 계속 병원에 다녀야 하는 게 엄마에겐 더 중요한 일인가 봐요.
나는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 선생님이 주시는 ‘공주 비타민’이 좋은데 엄마에게는 안 주니까 재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우산을 쓰는 건 할머니 댁에 가기 전 마렵지도 않은 오줌을 눠야 하는 것처럼 귀찮고 하기 싫은 일이에요.
오늘처럼 학교에 갈 때 비가 내리면 엄마는 편의점 앞에 있는 파라솔만큼 큰 우산을 내 머리 위에 씌워 줘요. 내가 멘 가방이 젖으면 안 된대요. 가방은 병원에 안 가도 되는데 가방도 비를 맞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엄마는 검은색 큰 우산 속에서 나와 함께 걸을 때면 종종 노래를 불러줘요. 지금보다 내 키가 두 뼘이나 작던 시절에 뽀글이 선생님한테 배운 “옥수수”라는 노래예요.
“엄마가 어렸을 때 비 오는 날이면
밖에 나가 놀지 못해 집에서 심심할 때
어디선가 향긋한 맛있는 냄새
옥수수 옥수수 나는 좋아요.
옥수수 옥수수 노란 노란 향기가
옥수수 옥수수 나는 좋아요.”
나는 이 노래를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에 다 외우고 있어요. 그래서 엄마가 노래할 때 기억을 못 하거나 틀린 부분이 있으면 내가 고쳐주곤 해요. 엄마는 늘 똑같은 부분을 틀리거든요.
엄마는 “어디선가 향긋한 맛있는 냄새”를 매번 “어디선가 맛있는 옥수수 냄새”로 바꿔 불러요.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가 잡은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말해요.
“아니~ 향긋한 맛있는 냄새”
“아, 맞다. ‘어디선가 향긋한 맛있는 냄새.’ 그런데 우리 서희 어떻게 알았어?”
나는 엄마를 바라보며 엄마 말을 따라 해요.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냐니요? 이 노래는 내 키가 지금보다 두 뼘이나 작았을 때부터 비가 오는 날에는 엄마가 꼭 불러줬고, 여름에 할아버지가 옥수수를 보내주셨을 때마다 엄마가 옥수수를 찌며 불러주던 노래인 걸요.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무언가를 기억해 말할 때마다 “어떻게 알았어?”라고 되물어요.
며칠 전에도 할아버지가 보내주신 옥수수를 까면서 내가 엄마한테 물었지요.
“엄마, 서희 옥수수 잘 까지?”
“응, 서희 옥수수 잘 까.”
“기억나.”
“뭐가?”
“아빠가 옥수수 좋아해.”
“응, 아빠가 옥수수 좋아하지.”
“기억나.”
“뭐가?”
“아빠 병원에 옥수수 가져다줬어.”
“응? 아빠 병원? 아! 작년에 아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옥수수 쪄다 줬었지. 그런데 서희 어떻게 알았어?”
내가 세상에서 엄마만큼 사랑하는 아빠가 일주일이나 집에 안 오고 병원에 있었는데 그걸 기억 못 하다니요? 밤마다 엄마는 옥수수를 쪄서 나랑 아빠한테 가져다 드렸는 걸요.
나는 이것 말고도 기억나는 게 많아요. 내 몸에 묻혀 놓은 비누 거품이 샤워기 물에 씻겨 내려가듯 사라지는 기억 중에는 “나비가 날아온다” 며 플라스틱 나비 모양의 바늘로 내 팔을 찌르던 일, 내가 누워 있던 병원 침대 옆에 규칙적으로 들리던 거슬리는 기계 소리, 차가운 젤리를 내 가슴에 뿌리고 연양갱처럼 생긴 막대기로 내 가슴을 문지르던 일, 간호사 선생님이 떫고 쓴 주황색 약을 내 입에 넣었을 때 빨리 자라며 나를 안고 흔들던 엄마의 가슴이 기억나요.
가끔씩 떠올리면 화가 나는 일에는 큰오빠가 엄마 몰래 내 머리를 꽁꽁 때리는 일, 친구가 아무 말도 없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가 갖고 놀던 장난감을 가져가는 일, “조서희! 오빠 방에 들어오지 말랬지!”라고 소리치며 오빠 방에 펼쳐 놓고 색칠하던 책들을 방 밖으로 던져 놓던 작은오빠의 모습이 기억나요.
퇴근하는 아빠 손에서 풍겨오는 치킨 냄새처럼 아주 기분 좋은 기억들도 있지요. 어린이집에서 하원할 때 외할머니가 어린이집 앞에서 바나나킥을 들고 기다리던 일, 제주도에서 아빠가 큰 꽃게를 잡아 보여주던 일, 엄마가 끓여 주는 너구리 얼굴이 들어 있는 아주 매운 라면의 맛, 편의점에서 복숭아 마이쮸를 하나만 골랐을 뿐인데 다른 한 개를 더 줬던 일 등 나는 아주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어요.
엄마는 내가 이런 것들을 기억해 낼 때마다 “어떻게 알았어?”라고 묻는지 잘 모르겠어요. 엄마도 다 알고 있는 일이면서 왜 나는 모른다고 생각했을까요?
내가 기억하는 일을 정작 엄마가 잊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내 마음에서 그 말들을 꺼내는 방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어요.
엄마는 나랑 색칠공부하기로 했던 거 기억 안 나?
엄마는 나랑 커피숍에 가기로 했던 거 기억 안 나? (엄마가 커피숍에 가야 내가 컵에 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어요.)
엄마는 나랑 저녁 먹고 산책 가기로 했던 거 기억 안 나?
엄마는 밥 먹고 나면 컵라면 먹어도 된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
엄마는 내가 치료 잘 받으면 콩순이 편의점 세트 사준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
엄마는 치킨 먹고 나서 콜라 마셔도 된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
이 밖에도 나는 엄마가 기억했으면 하는 것이 정말 많아요. 하지만 나는 마음에 든 말을 무엇으로 꺼내야 하는지, 어떻게 소리 내야 하는지 잘 모르니까 왜 기억하지 못하냐고 말하지 않는 것 뿐이에요.
치료실 선생님이 따라 하라고 하는 말들, 엄마가 “다시 한번 말해 줄래?” 하는 말들, 친구들이 “서희야, 뭐라고?” 되묻는 말들에 대답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에요.
V를 하며 사진을 찍고 싶을 만큼 나를 기분 좋게 했던 말들,
가슴이 쿵쾅쿵쾅 뛰게 했던 말들,
왼쪽과 오른쪽을 바꿔 신은 신발을 신고도 넘어지지 않고 폴짝폴짝 뛰어 현관문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던 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