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ㅋㅋㅋ 09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독성 Jan 28. 2023

랜선 프러포즈

2013 아트 라이팅 워크숍에 대한 이야기를 쓰다 보니 그가 떠올랐다.

내 옆에 앉아있던 A 씨. 지금은 이름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A 씨. SNS에서 몇 번 본 사람도 지나가다 한 번에 알아보는 매의 눈이지만, 그분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기 싫은 걸 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에게 이메일로 청혼을 했다.

사귀었냐고. 그랬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워크숍에서 만난 분들과 공동 작업을 위해 전화번호를 교환했고, 그분은 따로 연락이 왔었다.

만나자는 그분의 연락에 이 핑계 저 핑계 둘러대며 자연스레 연락이 멀어졌다.

딱 한번 공적인 자리에서 만난 사람에게 청혼을 당했다.


어느 날, 뜬금없이 당신과 결혼하고 싶소 이메일이 왔다.

XXX 아니면 XXX 둘 중에 하나이거나, 조선시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한번 본 사람과 결혼이라니, 맞선도 아니고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고. 밥 한번 먹었으면 이미 식장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메일을 싹 다 뒤져봤는데, 결혼 전 과거 청산을 위해 이메일 정리를 했더니 휴지통에서도 사라진 지 오래이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설마, A 씨가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며 이 이야기를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불안감이 엄습한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메일로 한자를 섞어가며 혼사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옛날에는 혼사를 이렇게 저렇게 정했다는 대충 그런 이야기. 아트 라이팅에서 봐서 그런가 예술가적 XXX 기질은 충분한 거 같았다. 읽다 보니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서 얼른 메일 창을 닫아버렸다. 운명이라느니 뭐라느니 헛소리를 재빨리 차단했다. 


괜히 겁이 나서 조마조마했던 기억. 상대방의 마음 따위는 상관 안 하는 제멋대로의 직진은 어이없는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이메일 청혼을 받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춤 모임에서 A 씨 이야기를 들었다. A라는 이름을 여기서 들을 줄이야. 이때다 싶어 황당한 이메일 청혼 사건을 공개했. 역시나 A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 XXX 임에 틀림없다. 무용 모임에도 가끔 출몰한다A 씨를 확인한 후, 그는 예술계를 기웃거리며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라고 론지었다.







이 청혼은 상대방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어 갈팡질팡 기웃거리는 썸 타는 관계, 그런 정도가 아니다. 내가 마음이 있던 없던 전혀 개의치 않고 아무렇게나 만만하다고 툭 한번 찔러본 낚싯대 던지기 정도. 

만남을 유지했겠기로서니 랜선 청혼이 가당키나 한가. 암만 시대가 메타버스, 가상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사랑을 속삭이며 다짐을 해도 백년회로가 희박한 요즘 시대에 얼굴 한번 안 보고 결혼해서 애까지 아바타로 낳을 거니.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은 지켜주고 싶다. 인간적으로 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