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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롬 Dec 18. 2024

흰 알약 두 개

2024년 8월  내 이름이 적힌 약봉지





흰 알약 두 개가 봉지에 들어 있다. 작은 약봉지에는 약의 명칭과 용량, 내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정신과 약은 약국이 아닌 병원에서 준다는 것과 약봉지에도 이름이 적혀 나온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작은 알약 두 개가 내 심장을 진정시켜 줄 수 있나 의심스러웠지만, 30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요동치는 심장의 움직임이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겨우 알약 두 개면 되었다니... 이런 젠장.. 안심되기도 했고 씁쓸하기도 했다.


약을 먹는 아이들이 많아졌고.. 약이 미치는 영향도 몸소 체험하게 되다니.. 이 와중에 아이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반갑기도 했다. 살만 해 졌나? 그리고 정말 아이들이 축 쳐진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이나 멍한 눈빛과 굼뜬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뭔가 중력이  당기음도 몸고 추가 달린듯 무거웠다. 불안이 가벼워 것이라면 차라리 무거운게 그때는 더 안정감을 주었다.


일을 마친 뒤에 함께 밀려드는 불안함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일을 만들고 바쁜 일상을 보내왔었다. 을 마친뒤 외로운 느낌이나 공허함은 익숙한 감정이여서  다시 일을 만들고 집중해서 해내고 뿌듯해하고 함께한 이들과 기쁨을 나누었다. 나의 존재가 그것으로 채워지는 듯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작은 나의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을 받는 중년의 교사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오히려 다른 곳에 있었다. 잠을 못 잔 여파는 다운된 컨디션으로 예민하고 만들었다. 인상이 써지고 말이 강하고 짧게 나왔다. 점점 더 웃음이 없어졌다. 그 와중에 공부하는 습관을 놓지 못하고 뭐든 배우는 것에 시간을 쓰는 습관이 반복되었다. 이번에 신경과학이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 덕분에 약을 먹는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니 모든게 동전의 양면이라는 말은 맞는것 같다.


이성적으로 이해했다고 해도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약을 먹는 것이 마치 지금껏 노력해 온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야. 약은 그저 지금까지 익숙해진 나의 자율신경계 반응들을 느려지게 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야'. 신경과학이 심리학에 적용되면서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심장은 뇌보다 400배 세포가 많아서 '가슴이 아프다'는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는 것이나, 이성과 감정 그 이상으로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약을 먹는 것을 선택하며 이성으로 조절되지 않는 몸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 트라우마와 애착 손상이 남긴 상처들에 대한 것이었다. 왜 긴장도가 높은 지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그대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바꿔보았다. 이해한다고 해서 미세한 떨림과 우울한 느낌들까지 사라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나뭇가지를 뱀인 줄 알고 도망갔던 선조들이 살아남았고, 불안이 컸던 조상들이 살아남아 우리의 DNA에 불안이라는 유산이 남겨주었듯이 나의 유년시절은 큰 불안이라는 유산을 남겨주었다. 아주 오래도록 그렇게 인간은 사자를 사냥하며 살고 있지 않지만 지금은 눈앞에 사자는 없다. 스트레스가 지속된다는 것은 눈앞에 사자가 있는  듯 살아가는 것과 같다. 긴장과 불안을 느끼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것이지만 지속될 때 몸에 문제를 일으킨다. 이쯤 되니 나의 몸에도 문제가 생긴 것 같다. 


호시탐탐 올라오는 '실패했어'라는 목소리에 "나의 자율신경계는 자극에 빠르게 반응하며 많은 양의 도파민을 분비해서 심장을 더 빠르게 뛰게 하는 거야, 이 약은 그런 자동반사적으로 흘러넘치는 호르몬을 늦추게 하는 데 필요한 거뿐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가진 짧은 신경과학적 지식이었지만 나를 좌절의 늪에 빠질 때마다 꺼내는 데 유용한 근거였다.




여름방학은 짧은 것이 늘 아쉬움이었지만 이번 여름은 유난히 길었고 뜨거웠다. 여러 글을 방학이라는 기간에 적어 놓았다. 욕도 써보았고, 악도 써보았다. 나의 마음도 지나간 8월처럼 그대로 흘러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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