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와 '아직'의 사이라는 말이 가끔 일상에서 피부로 느껴질 때가 있다. ‘이미’와 ‘아직’의 사이가 길어지면 ‘희망 고문’처럼 희망하는 바가 어느 순간 고통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미’인 건지, ‘아직’인 건지 차라리 확실히 알려주겠어요? 아, 형벌도 ‘사형’으로 결론날 때에는 ‘즉사’시키는 형벌이 가장 덜 가혹한 형벌이라고들 했던 것 같다.
요즘은 구직을 하면서 ‘이미'와 '아직'의 사이를 실감한다. 거의 3개월 가까이 ‘이미’와 ‘아직’의 단계가 수차례 반복되었는데, 오늘 날짜로 ‘이미’는 더 멀어졌다. 일상에서 종종 마취제 혹은 진통제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 오늘이 확실히 그런 날이었다. 보통 술이나 담배가 이런 마취제 혹은 진통제의 클리셰라고 할까, 그렇게 등장하고는 하지만 나와 지인들, 혹은 지인이었던 사람들은 술이나 담배를 별로 안 좋아한다, 혹은 안 좋아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술이나 담배를 삶의 진통제로 쓰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삶의 씁쓸함을 달랬다. 어떤 친구는 우울할 때 굉장히 침잠해지는 음악을 듣거나 굉장히 시끄러운 음악을 들었다. 다른 친구는 항상 아메리카노만 마시더니, 갑자기 휘핑크림을 잔뜩 얹은 카페모카를 마시는 걸로 우울함을 표시하곤 했다.
일상에서 내가 우울함을 달래는 진통제로 애용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바뀌는 편이다. 그러니까, 내 진통제에 유일한 시그니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 같은 날엔 초콜릿이 잔뜩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먹은 뒤, 하염없이 산책하는 게 도움이 되었다. 근데, 이 행위를 의식처럼 조금 진지하게 혹은 까다롭게 하면 해소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 면이 있다. 그러니까, 이럴 땐 ‘다크 초콜릿’이 들어 간 ‘녹차 바’ 같은 식으로 뭔가 일상적으로 잘 안 먹는, 매일 아이스크림을 먹지만 이 아이스크림만은 30일에 한번 먹는 아이스크림이며 그 조합이 불가해하지만 결국엔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고르면 더 도움이 되는 면이 있다. '이' 아이스크림은 요즘엔 흔해졌지만, 아직도 호불호가 강한 ‘민트 초코바’ 같은 조합처럼,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맛이 나야 하는데 그래도 끝 맛은 단 맛이 남는 아이스크림이어야만 하는 식이다.
그렇게 이번에 우울함을 달래는 의식을 행하기 위해 고른 아이스크림은 ‘다크 초콜릿’이 들어 간 ‘녹차 바’였다. 이 조합은 ‘민트 초코바’처럼 이해할 수 없는 맛은 아니지만, 이것도 마냥 순하거나 단 맛인 것도 아니다. 녹차 같은 담백하면서 텁텁한 맛이 다크 초콜릿을 만나면 이상할 정도의 느끼함으로 둔갑하고 말기 때문이다. 아, 이 정도 당도와 느끼함이라면 일상의 씁쓸함과 이해할 수 없는 결과를 깜빡할 정도는 되는구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고 나서, 하염없이 걷고 나면 우울함을 걷어내는 의식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다.
걷는데 집중하면, 뭐 몇 달 전에 읽은 뇌과학 책에서는 ‘세로토닌’이 생겨서 기분이 좋아지는 거라던데, 그래서 그런지, 아니 그냥 생각이 없어지게 되는 것 같다. 낮에 걸으면 그냥 햇살 쬐다가, 그렇지만 차에는 치이지 앉게 도보를 따라 걷는 것에 집중하게 되고, 저녁에 걸을 때에는 어둠이 깔리기 전에 산책을 마치고 어딘가로 돌아갈 생각에만 집중하게 된달까.
오늘도 ‘아직’과 ‘이미’ 사이를 거닐면서 그렇게 이해 불가해한 맛의, 그래도 끝 맛은 텁텁함보다 단맛이 남는 아이스크림을 먹은 뒤, 무작정 걷다가, ‘아직’ 어딘가에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미’ 순순히 단순하고 소박해진 상태로 유난히 씁쓸했던 하루를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