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이 나쁜 년, 화냥년! 더러운 살인자!” “더러운 살인자가 어딜 뻔뻔스럽게 드나들어? 우리 마을을 더럽힌 그 년을 잡아!”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떠들어 댔다. 몇 명은 마을 경관을 따라가고 몇 명은 여자에게 돌을 던졌다. 돌 하나가 여자 어깨에 맞았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뛰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이 여인은 간음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율법에 의해 돌로 쳐서 죽여야 하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소?”
이렇게 묻는 군중에게 예수는 말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예수는 군중의 심리를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내면의 들끓는 욕정에 대한 죄의식’을. 약한 여인에게 쏟아붓고 있는 그들의 '한없이 어두운 마음'을.
군중들이 한 여인을 희생 재물로 삼고 나면, 한동안은 평화로울 것이다. 하지만 이내 들끓는 그들의 욕정은 또 다른 희생 재물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려 한 것이다. “네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죄를 보아라!”
자신의 죄를 선명하게 보고 나면, 이 세상을 항상 경외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는 ‘식(食)과 성(性)’이다. 식은 개체의 욕구이고 성은 개체를 넘어서는 영생의 욕구다.
문제는 이 두 욕구가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식의 욕구를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는데, 성의 욕구에 깊이 빠지게 되면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견우와 직녀’를 생각해 보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자 ‘사랑밖에 난 몰라!’가 된다.
크게 진노한 옥황상제는 두 사람을 은하수 양쪽에 떨어져 살게 하고는 1년에 한 번만 만나게 한다.
이렇듯 성의 욕구는 인간사회에 치명적이다. 성은 언젠가는 죽어야 할 인간에게 영원을 체험하게 한다.
그러니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일할 생각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모든 인간사회에는 성의 금기가 있다.
그런데 인간은 간절히 소망하게 된다. ‘금지된 것’을. 그래서 성은 엄격한 금기이면서 종교, 예술의 이름으로 해방된다.
일상의 금기는 우리의 마음을 이분법에 빠지게 한다. 선과 악, 성과 속, 삶과 죽음... .
인간의 삶은 한없이 초라해진다. 인간의 삶이 원초적인 신성을 회복하려면 금기를 어겨야 한다.
금기가 깨질 때 인간은 천지자연 그 자체가 된다. 아리 에스터 감독의 영화 ‘미드 소마’에는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루벤이 예언자 역할을 한다.
루벤은 금기에 얽매이지 않기에 천지자연과 쉽게 소통을 한다. 호르가 공동체 마을은 이렇게 금기와 더불어 잘 살아가게 된다.
예수는 인간사회의 금기의 문제를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가 조르바 같은 인품을 지녀야 할 것이다.
조르바는 과부를 희생 재물로 삼아 자신들의 안녕을 찾으려는 마을 사람들을 본다.
“이 나쁜 년, 화냥년! 더러운 살인자!” “더러운 살인자가 어딜 뻔뻔스럽게 드나들어? 우리 마을을 더럽힌 그 년을 잡아!”
조르바는 그들 전체를 상대로 싸우지만 역부족이다. 결국 과부는 칼에 찔려 죽게 된다.
우리가 조르바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아직 저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 마음속에는 많은 금기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될 일도 우선 안 된다고 합니다
- 이성복, <금기> 부분
인생은 금기와의 투쟁이다.
금기에서 자유로워진 만큼이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