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확행 Jan 12. 2024

비닐봉지 없이 장보기

성공? 실패?

비닐봉지 없이 장을 보려면 동네 슈퍼나 마트에 가지 않아야 한다. 지하철 역 근처, 카드 결제는 안되고 현금만 받는 이름 없는 청과물 가게에 가야 한다.



이 작은 청과물 가게에는 먹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미관이 예쁘지 않은 과일들을 떼다가 파는 것 같다. 채소류는 일반 마트만큼 신선하고, 가격은 훨씬 저렴하다. 가게로 들어서면 가판대 위 빨간색 플라스틱 바구니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바구니에 상품만 담겨있다. 물품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제품들은 플라스틱 트레이와 랩에 싸여있지 않다. 이것이 내가 이 가게를 애정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콩나물이나 잎채소 같이 손님들이 손으로 만지다가 상하기 쉬운 품목들은  비닐봉지에 담겨 있지만 그 정도는 수긍이 간다. 장 볼 때마다 매번 찾아가는 건 아니지만, 가게 근처로 오고 갈 일이 있을 때 들려보는 편이다.



"에헤이! 엄마. 그거 계속 만지면 안 된다니깐. 적당히 눈으로 보고 사셔야지, 이렇게 물건을 다 헤집어 놓으시면 어쩌실 거야! 다른 손님들 사가실 물건 다 상해 상해"

가게 안쪽에서 물품을 정리하던 직원분이 어느 할머니에게 결국 목소리를 높인다. 진짜 아들이 엄마한테 짜증 내는 것처럼.

"아니, 내가 언제 물건을 상하게 했다고 그래? 물건을 보고 사야 것 아니야?"

아까부터 파프리카가 담긴 소쿠리들을 들었다 놨다, 파프리카를 쥐었다 놨다 하시던 할머니. 직원분을 노려보시면서 더 빠락 화를 내신다. 

"다른 슈퍼들처럼 비닐에 좀 딱딱 넣어서 팔지, 소쿠리에 이게 성의 없이 뭐야"

엄마, 우리 가게 처음 오셨나 봐? 이게 우리 스타일이야   



나는 마음속으로 아주 크게 외쳤다.

'맞아요 할머니! 원래 이 가게 스타일이 그래요. 제가 비닐봉지 포장 안된 당근이랑 양파 사러 여기까지 내려온다고요! 비닐봉지에 딱딱 넣어서 팔라니요. 그런 말씀하시면 안 되세요.'


내가 바라는 우리 동네 슈퍼마켓 모습 @Unsplash



암산 천재 카운터 언니가 빛의 속도로 계산을 하신다.

"만 천 오백 원입니다."

나도 질세라 빛의 속도로 장바구니를 꺼내며 응수한다.

"비닐봉지 말고 여기 담아주세요!"

"흙당근이라 장바구니 더러워질 텐데."

"괜찮아요. 나중에 제가 닦으면 돼요"

"착하네"

암산 천재 언니가 나를 보며 웃으셨다.



'착하다'라는 칭찬을 언제 들어보았는가? 어른이 어른에게 있는 칭찬이었던가? 뭐라도 대답해야 하지? 비닐봉지 한 장 안 썼다고 듣기에는 민망하고 과한 칭찬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해 허둥대고 있을 때 암산 천재 언니가 장바구니를 돌려주신다. 

"비닐봉지 돈 안 받고 그냥 줄 수 있지 않냐며 먼저 묻는 사람들도 많고, 봉투 두 개씩 담아 달라는 사람도 많아요. 이거 착한 일 맞아."

<비닐봉지 안 쓰기>를 위해 애쓰는 중이지만 늘 한결같지는 않다. 부끄럽다.



암산 천재 언니는 나의 진짜 모습을 몰라서 그런 말씀하신 거다.



마트 가기를 너무가 귀찮아하는 나. 배송을 애정하는 나. 신용카드 결제 시 받을 수 있는 할인과 적립 포인트에 목을 매는 나.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다 보면 맞닥뜨리게 되는, 판매와 유통, 배송 과정에서 발생되는 많은 포장재는 너무나 불편해하는 나. 지극히 이율배반적인 나의 모습. 암산 천재 언니의 '착하다'라는 칭찬이 순간 너무나 민망했던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율배반적이고 한결같지도 않은 내가 비닐봉지 장 덜 쓰는 것에 과한 진심을 담는 이유도 있다. 비닐봉지 쓰는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은 나의 작은 바람 때문에. 큰 일을 해낼 깝은 감히 없어서. 그래서 나만 아는 유난을 오늘도 떨어본다.

 

이전 06화 엄마의 기후행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