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싯바늘을 던지는 ‘진실’
콩덩이가 온전하게 맛있는 청국장을 순영과 먹었다. 건강문제로 힘든 시간을 가로지르는 중인데도 원망이나 분노의 빛이 없다. 완전히 받아들이고 새로 산다. 부드러운 말에도 힘이 있으니 나보다 더 살아있는 것 같다. 생동감을 위장할 수는 없으니 위장한 그것은 곧 부산스러움으로 변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를 만나 밥 먹고 이야기하는 건 언제나 좋다.
순영은 늘씬한데다가 얼굴까지 갸름한 미인이다. 그런데 자신은 어릴 때부터 참 못생겼다고 생각했더란다. 자기처럼 키 크고 못생긴 사람을 누가 좋아할까 했다는 거야. 그러니 좋아한다는 말을 듣자 너무 고마워서 연애를 했다지 뭔가. 고마워서 만나다가 결혼을 했다니! 순영 같은 사람이! 어이없었다. 기막히게도 얼마 전 대학동기 인숙이도 그런 말을 한 터라 나는 흥분해서 떨리기까지 했다.
친하진 않았어도 인숙이가 똑똑한 애란 건 알았거든. 그런데 그 친구한테 엄마가 이랬다는 거다. 아버지도 없는 가난한 집안의 장녀를 누가 데려가겠니, 너 시집가기 어려울 거야, 라고. 그런데 남편이 결혼해 줘서 고마웠다는 것. 충격적이었지만 엄마가 어쩌면 그런 말을 하냐고 하지 않았다. 너 같은 똑순이를? 하하 네가 결혼해줘서 이제 남편이 고마워하겠네, 하면서 착하게 웃어 줄 수 있었다. 정신분석 독서 초보자로서 감히 그 엄마의 삶을 유추하며 해석하려 덤비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그 남편은 순영이 자신의 용광로임을 딱 알아본 게 아니겠는가.
그래, 바로 너!
서로 기댈 언덕이 되어 담쟁이처럼 손잡고 오르기를 요청한 거다. 먼저 담쟁이 손을 순영에게 붙인 셈이다. 정확한 생명의 호명, 거부할 수 없는 부름에 그녀는 응답했다. 하지만 이미 그보다 먼저 남편의 이름이 순영에게서 발화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람 둘이 눈 맞고 마음 맞는 일, 선택하는 동시에 선택되는 일은 침묵 가운데 폭발하는 에너지의 총합이며 우주적 만남의 순간이다. 그러니 아무리 잘못 만났어도 그때는 잘 만난 것이다. 세월과 함께 어떤 변화를 만들며 어떻게 잘 싸울지는 모르는 거니까. 만남에는 잘잘못이 없는 거야, 좋고나쁨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일시에 어떤 이미지나 시선, 냄새와 목소리의 유혹으로 몰려오는 그것, 급박하고 강력하게 통째 덮쳐오는 몸의 말, 낚이고 사로잡는 매혹이다. 무수한 작은 몸짓과 동작들, 표정이나 제스처들 사이를 황금비늘처럼 반짝이며 낚싯바늘을 던지는 ‘진실’이자 수시로 변신하고 꼬리를 감추는 ‘보물’인 그것, 모르기 때문에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그것, 원인도 시작도 모르는 그것을 a라고 하자. a는 진실을 과장하거나 또는 말하도록 돕는 동시에 숨기면서 말하지 않기 위해 하는 말이자 베일이며 허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a는 마침내 내가 필요하여 간절히 찾을 때 발견되기 위해 숨지 않을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저 근원적 요청에 압도되는 기쁨으로 멋도 모르고 부르며 답하는 아름다움이며 매력이며 황홀함이라 하자. 충분한 소통이라 믿었던 상대방과의 관계가 오직 자신의 환상체계 안의 홀로 춤이자 거울과의 대화였음을 발견할지라도 말이다. 꺼풀 벗어진 후에도 화들짝 놀라거나 말거나 그것까지 사랑이고 그게 바로 사랑이며 삶을 엮는 보편적 방법으로 여겨왔다. 선택이란 게 가능한가, 그렇다면 누구의 선택인가. 몸을 통과하지 않은 엄청난 지식을 삼척동자 나이부터 가질 수 있는 요즘, 우리는 더 현명해졌는가, 현명한 선택을 하는가. 현명이란 무엇이며 과연 선택은 내가 하는 건가, 나의 선택이라는 믿음은 누구의 생각에 따른 것인가. 생겨먹은 대로 굴러가며 무수한 선택지들에게 선택당할 뿐인 것은 아닐까. 결국 스스로 생각하기다. 그 생각이 어떤 생각이고 누구의 생각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거나 생각하지 않기조차 생각하기의 일부일 뿐.
이제 의자를 물려준 기성세대로서 주로 지켜보는 나에게 삶과 사람이 갈수록 흥미롭다. 바뀌는 삶의 양상 지켜보기, 내가 살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무지했던 삶의 조각들을 알아가는 일이 참 즐겁다. 무한해 보이는 인간의 가능성에 자주 두근두근 하는가 하면 불가능성에 조마조마도 하면서. 물론 가능성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인식한 채. 무엇에 대한 무엇, 또는 누가 말하는 누구의 무엇에 대한 긍정인지 따져보면서 말이다. 이렇게 정신분석이 말하는 양면성과 동시성으로 사유하기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거듭 이끌어간다.
간식으로 줄 오징어를 사가지고 소리와 뽕띠가 기다리는 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밭둑에 진달래 두 그루 어울려 꽃피운 자태가 참으로 멋스럽다. 같은 방향으로 휘면서도 함께 길게 뻗어 오른 가지들이 마주잡은 손처럼 하늘을 받들었다. 차를 멈추고 내려서 곁에 선다. 서로를 피워올리는 사람 둘을 보는 듯하다. 진짜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