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보기 아까운 육아의 순간을 나눠요. 이.맛.육 #3
어떤 음식, 어떤 노래는 특정 사람, 특정 시기를 떠오르게 만든다.
누군가에겐 학교 앞 분식집 떡볶이가 그렇다. 그 맛 하나로, 시간을 거슬러 교복을 입고 수다를 떨던 학창시절로 달려가고 싶어진다.
또 누군가에겐 한때 열광했던 90년대 아이돌의 재결합 소식이 이제는 40대를 코앞에 둔 어른을 “언니!”라고 호들갑을 떨게 만들기도 한다.
내게 그런 음식은 ‘무말랭이’였다.
멀리 살아 자주 볼 수 없었지만,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주셨던 외할머니의 맛.
직접 농사지은 오동통한 무를 손질해, 햇살 좋은 날 마당 가득 펼쳐 말리신 뒤, 비린 맛은 싫어하는 나를 위해 젓갈은 쏙 빼고 감칠맛만 남긴 양념으로 버무려 주신 그 반찬.
외할머니는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매년 그 번거로운 작업을 기꺼이 거치셨고, 외갓집에 방문할 때마다 커다란 반찬통 2통에 꽉꽉 눌러 담은 무말랭이는 우리 차 트렁크에 실렸다.
내게 무말랭이는 시중 그 어떤 반찬보다 더 깊은 맛이었고, 그 어떤 말보다 다정한 표현이었다.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새 5년. 이젠 나의 엄마가 외할머니의 뒷모습을, 정신없는 일상 속 짬을 내서 얼굴을 들이미는 내가 젊은 날 엄마를 닮아있다.
엄마도 ‘외할머니’라는 호칭을 듣게 되어서일까. 늘 바쁜 나를 위해 바리바리 음식을 챙겨주는 모습도, 손수 감을 깎아 말려 말랭이로 만들어내는 정성도 외할머니의 시간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듯 익숙하다.
엄마표 유기농 간식, 감말랭이. 당도가 알맞은 감을 굵직하게 썰어낸 뒤 말랑하게 말려낸 그 간식은 아이들에게는 눈치 안 보고 먹어 수 있는 젤리고, 나에게는 마음의 위로다.
며칠 전, 잠들기 전 아이들과 이불 속에서 “사랑해”를 주고받던 어느 밤. 문득 딸에게 물었다.
“보아야, 사랑이 뭐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대답.
“사랑은, 감말랭이 같은 거야.”
“왜 감말랭이 같은데?”
딸은 익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랑말랑하잖아.”
그 말에 마음이 울컥해졌다. 아이들은 세상을 떠난 나의 외할머니를 만난 적이 없겠지만, ‘말랭이’라는 말랑한 매개체를 통해 4대에 걸쳐 사랑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날 밤, 나를 오래도록 뭉클하게 만들었다.
사랑을 알기에 너무 어린 나이는 없나보다. 나보다 더 구체적으로 사랑을 알고 있는 딸에게 나는 오늘 사랑의 정의를 새로 배웠다. 어쩐지 입안 가득, 그리웠던 외할머니표 무말랭이의 맛이 퍼지는 기분이다.
2025.07.17
가끔은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말한마디에
예기치못한 선물을 받아 마음의 위안을 얻고,
미처 자라지 못한 내 안의 나를 키워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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