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伴侶)
영등포에 볼 일이 있어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 밤공기를 가르며 내 옆을 지나가는 강아지와 산책 중인 아주머니를 만났다.
작은 몸집의 강아지는 쫄랑쫄랑 내 옆을 지나가다가 내 앞에서 멈췄고, 나는 자연스레 아주머니께 몇 살이냐고 물었다.
“아, 너무 귀여워요~ 몇 살이에요?”
“10살이에요. 이름은 설희예요.”
두 아들은 출가했고, 남편은 요양원에 계신다고 한다. 그렇게 설희만 곁에 남아 아주머니와 일상을 함께 나누고 있다고 했다.
나는 어릴 적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지만,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엄마의 반대로 끝내 키우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미 자식이 셋인데 강아지까지 키운다면 엄마는 네 아이를 돌보는 셈이었을 것이다. 내가 뒤치다꺼리를 한다고 해도 결국 엄마의 손길을 거치게 되었을 테니, 엄마의 판단은 어쩌면 현명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된 지금, 반려견을 키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과연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함께 든다.
아주머니는 “강아지 키우는 데 돈 많이 들어요”라며 현실적인 충고도 해주셨다. 아프면 병원도 가야 하고, 미용도 해야 하고, 밥도 잘 챙겨야 하니까.
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아플 땐 병원 안 가도, 얘가 아프면 무조건 가야 돼요. 그래서 알바도 해요. 얘 밥값 벌려고~아휴 “ 웃으며 말씀하셨다.
힘든 내색을 하셨는데, 좋아 보이셨다. 설희가 삶의 원동력이자 이유가 되어주는 것 같았다. 아들들이 떠나고, 남편도 곁에 없는 적막한 일상 속에서 설희는 아주머니의 단짝이자 든든한 가족이었다.
설희는 주인의 옷차림을 보고 산책 가는지, 집에 있는지, 일 나가는지도 다 구분한다고 했다. 아주머니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옆에 와서 애교도 부린다고.
때로는 동물이 사람보다 사람을 더 잘 헤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미국에서 알게 된 카페 사장 언니가 떠올랐다.
언니는 반려견을 먼저 떠나보낸 뒤 큰 슬픔에 빠져 다시는 강아지를 키우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상실감은 거의 우울증처럼 깊고 길었다.
보다 못한 언니의 어머니가 “강아지 보러만 가보자”라고 권하셨고, 첫눈에 반해 그렇게 다시 입양한 새끼 강아지의 이름은 ‘우주’.
지금은 우주를 너무나도 아끼며 정성스럽게 키우고 있다. 카페에 종종 놀러 와 일하다 시간 나면 안아주곤 했는데, 보고 싶다. 잘 있겠지?
언니는 동물을 사랑하는데, 한국에 오면 유기견 봉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언니가 해 주는 이야기로 한국에 유기견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상을 보여주는데... 정말 충격적이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고속도로에 강아지를 버리고, 주인의 차는 유유히 멀어져 가는 장면.
쓰레기장 한편에서 강아지가 끙끙 앓고 있는 장면.
수십 마리의 강아지를 좁은 방 안에 몰아넣고 학대하는 장면들...
와..... 진짜 인간들 너무한다.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다.)
독일에서는 개를 키우려면 반드시 등록해야 한다. 책임 의식이 더 강하게 요구된다. 어떤 지역은 견주가 자격시험을 통과해야만 키울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내가 독일에서 개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볼 때는 ‘애완’보다는 ‘반려’, 곧 ‘가족’이라는 개념이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
반려(伴侶) : 서로 동반하며 살아가는 짝.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동반자.
한국에도 등록제도는 있지만, 강제성도 약하고 벌금 부과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유기동물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키울 준비도 안 되어 있고, 책임질 의지도 없다면 애초에 들이지 말았어야지.
한편으론 요즘 자주 보이는 ‘개모차(개 + 유모차)’는… 개인적으로는 조금 과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국 사회는 참 뭐든지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설희는 남자아이인데 예쁜 누나들이 만져주면 좋아한단다. 내가 만졌을 때 좋아하는 걸 보면 그 말에 신뢰가..
그렇게 처음 보는 아주머니와 나는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20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설희를 한 오십 번쯤은 쓰다듬은 것 같다. 설희의 애교에 기분 좋은 밤이다.
내 생에 반려견은 찾아올까?
시골 할머니댁에 있는 백구가 문득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