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0원의 가치

by 실버레인 SILVERRAIN


할아버지가 시골에서 올라오셨는데, 지갑과 휴대폰을 집에 놓고 오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저녁에 일정이 있으시고 내일 아침에도 일정이 잡혀 있어서, 내가 운전해서 시골에 다녀오라고 '명' 받았다.


아빠랑 함께 가기로 했다.


운전대를 잡는 건 오랜만이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는 대중교통이 워낙 잘 돼 있어서 굳이 운전할 일이 없었다.


나는 기계를 다루는데 능숙하지 않다.. 방향 감각도 없는 편이고, 어디갈 때 내비게이션이 꼭 필요하다.


자동차는 기계이고, 시골 가는 길은 익숙한 길은 아니다. 또 운전대를 잡을 생각 하니 긴장되었다.




긴장에는 이유가 있다. 2023년, 생일날. 미국에서 자동차사고가 날 뻔한 적이 있다.


운전을 시작한 지 두 달쯤 되었던 때였다.


골목길에서 대로로 진입하려는 중이었고, STOP 사인을 보고 좌우를 확인한 뒤 차가 없어 보여서 출발했는데.... 중앙 화단 오른쪽 뒤편, 사각지대에서 한 차량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중앙에서 끼익 급정거했다. 가까스로 부딪히진 않았다.


차에서 내려보니, 상대 차량엔 백인 젊은 할머니가 타고 계셨다. 아메리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때의 첫 번째 실수.

멈춰 선 그 상황 그대로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놀라서 찍지 못했다.


두 번째 실수.

내가 100% 잘못한 줄 알고 허둥지둥 보험과 라이선스 정보를 건넸다. 할머니의 정보는 받을 생각도 못 했고.


세 번째 실수.

내 차 사진도, 상대 차 사진도 안 찍었다.


갑자기 할머니가 내 차 앞 스크래치를 보고 우리는 사고가 났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건 내가 몇 주전 주차장에서 긁은 스크래치였다. 차가 멈춘 방향도 다를뿐더러 할머니 차에는 긁힌 흔적조차 없었다.


안타깝게도 내 차엔 블랙박스가 없었다. 미국에서는 블랙박스가 설치가 필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일이 있고 바로 블랙박스를 설치했다.)


그 뒤로 나는 계속 "사고가 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고, 할머니는 "사고가 났다"라고 말하며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나는 결과적으로 사고가 없었으니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뒤, 할머니가 나에게 클레임을 걸었다는 내용의 메일이 도착했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 총 네 번 정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미국의 행정처리가 너무 느리게 느껴졌다. 아니, 한국이 너무 비정상적으로 빠른 건가..?!


시간이 흐르고도 별다른 연락이 없길래, 상대가 사고를 입증하지 못해서 클레임이 취소된 줄 알았다.


그런데 2025년 3월이 되어서야, 2023년 11월 사건에 대한 진술서를 제출하라는 메일이 날아왔다.


메일에는 25,000~50,000달러의 청구 가능성, 변호사까지 개입한 내용 등이 담겨 있어서 깜짝 놀랐다. 할머니는 병원에서 진단서를 받고, 의사 소견서와 변호사 서류까지 모두 준비한 상태였다.


미국에 사는 지인이 말해주길, 이런 해프닝이 있으면 ‘땡큐’라고 한다고 한다. 의사, 변호사, 의뢰인이 함께 말을 맞춰 서류를 준비해 상대 보험사에 청구하고, 수령한 보험금은 나눠 갖는 방식이라고. 이런 방식으로 돈을 버는 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다...


나는 당시 가입했던 보험사에 메일을 보내고, 미국의 지인을 통해 직접 연락도 했다. 그 지인 말로는, 사고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상대가 서류 하나 냈다고 바로 보험금을 지급하려는 보험사의 태도가 너무 이상하다고 했다. 상황 파악도, 증거 수집도 없이 처리한 대응에 나도 황당했다.


이 사건 이후, 나는 운전할 때 훨씬 더 신중해졌다. 그리고 사고 발생 당시 내가 얼마나 미숙하게 대처했는지 반성하며, 다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뼈저리게 배웠다.


실제로 그 이후 내 차를 누군가가 뒤에서 박았을 땐, 가장 먼저 사진부터 찍었다.


그리고 저번 주, 그 할머니와 관련된 사건이 마침내 정리되었다는 메일이 도착했다. 정말 골치 아픈 경험이었다.




운전이 나에겐 마냥 편하지는 않다. 운전 중엔 항상 긴장상태를 유지한다.


아빠가 '내가 운전할까?' 나에게 물어봤지만


안 하면 늘지 않을 것 같아서, 또 운전감각을 잊을 것 같아서 오고 가며 내가 다 한다고 했다.


뭐든 직접 해봐야 는다...


5,290원의 1일 자동차보험을 들고 안전 운전하며 잘 갔다 왔다.


오늘로 나의 운전실력은 늘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의 사고의 가능성도 줄었다(고 생각해야겠다).


덕분에 날 좋은 날 시골도 갔다 오고


꽃이 곧 필 것 같다


집에 혼자 있는 백구 간식도 주고,



아빠랑 돼지국밥 데이트도 했다. 국밥 오랜만에 먹으니 맛있었다.



야무지게 리뷰도 써서 찰순대도 받고.



어느 지역인가 쌈장 + 순대 조합으로 먹는다길래 먹어봤는데... 이게 무슨 맛일까......?


소금에 찍어 먹어야겠다.


아이고 너도 피곤해


그런데 세 시간 운전했더니

긴장풀리며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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