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었는데, 어린애 두 명이 오더라고. 술 좀 마시다 들어갔지. 내 파트너는 고등학교 때까지 축구했다는 애였는데... 힘이 좋긴 하더라. 금방 끝나고 또 하고...”
“오호. 좋았겠네. 밤샜겠는데?”
“아니. 느낄만하면 끝나고... 느낄만하면 끝나고...”
“그래도... 나이 먹은 사람보단 낫지 않아?”
“아냐. 경험이 많은 사람이 좋아. 서둘지 않고 침착하고 느긋하고 어지간한 취향에도 맞장구 쳐주고. 다들 그래서 경력직을 찾는 건가?”
여름 더위를 피해 숨어든 모텔에서, 땀에 젖은 날 만지작거리는 후배와 이런 얘기를 했다. 섹스의 시작도 끝도 없이 서로의 땀에 허우적대며 세 시간을 보냈다. 그다음엔 뭘 했지?
소확행의 요소
하루키의 소설엔 어김없이 섹스가 등장한다. 그런데 특별히 요란스럽지도, 유난스럽지도 않다. 물론 약간 비정상적인 관계가 등장하긴 하지만. 언제 등장하든지 간에 늘 하던 사람과 늘 하던 곳에서 한다. 하루키의 섹스는 낯선 이와의 낯선 경험에서 오는 쾌감이 아니라 날 다룰 줄 아는 사람과의 깊고 긴 쾌감이다. 원나잇 스탠드나 <언페이스풀>에 나오는 충동적 일탈 같은 건 없다.
명란젓에 쌀밥 같다고나 할까? 김과 스팸과 김치찌개 한상 같다고나 할까? 딱히 유별난 건 없지만 먹을 때마다 맛있는 한 끼. 하루키 소설 속 섹스는 그런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하루키의 소확행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섹스다. 일상에 당연하게 있어야 하고, 당연하게 있어야 일상이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하루키가 생각하는 섹스다.
그래서 하루키에게 섹스는 사건이 아니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수영을 하고 달리기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클래식과 재즈를 듣고 고양이를 키우고 맥주와 위스키를 마시고 여행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는 것처럼 섹스는 일상이다.
결론적으로, 그 당연한 것이 특별한 것, 희귀한 것이 된 사회, 나라, 그리고 사람은 불행하다. 초식남과 섹스리스는 증가하고 부드러운 경력직은 점점 줄어드는 사회... 어째 삭막하지 않나?
기억으로 몸을 덥히기 위해선, 당연하게도 부드러운 경력이 있어야 한다.
2023.0125
부드러운 경력
"총은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신제품보다 상태가 좋은 중고가 오히려 더 믿을 만 해." 다마루는 권총을 아오마메에게 받아 들고 다루는 법을 설명했다.
-1Q84 - 2권 중에서-
사람도 마찬가지다. 연애 경험 한번 없는 20대 후반 너머의 이성만큼 까다로운 연애 파트너는 없다. 아직도 몇몇 남자들이 숫처녀의 로망을 갖은 채 그녀의 첫 남자이길 바라는지 모르겠다. 내가 스포츠 뉴스를 볼 때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고졸 신인 투수에 억대 연봉과 계약금을 주는 거다. 질만큼 지고 던질 만큼 던지고 최소한 두세 팀에서 다양한 보직을 거쳤거나 선발로 40번 이상 등판해 10승 이상을 두 시즌 이상 달성한 20대 후반의 투수에게 정말 많은 돈을 써야 정상 아닐까?
예쁘고 잘 생겼다고 사랑 잘하는 거 아니다. 날씬한 게 곧 섹시한 것도 아니다. 착하다고 밤에도 착한 건 아니다. 키 크다고 다른 것도 큰 거 아니다. 운동 잘한다고 정력까지 좋은 건 아니다. 성실하고 착하다고 밤에도 그런 건 아니다. 낮에 그 사람과 밤에 그 사람은 다르다.
바람둥이까지는 아니어도 이상하게 연애를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딱히 잘 생긴 것도 예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들에겐 무경험자가 갖지 못한 부드러운 경력이 있다. 이성과 있을 때 본인도, 그리고 상대방도 느슨하게 만들고 촉촉하게 만들 줄 아는 부드러운 경력이 있는 거다.
빈티지와 엔틱의 매력은 옷이나 가구, 자동차에만 국한된 게 아닐지도. 사람도 세월과 경험의 손길이 거쳐 자신만의 무늬를 가진 사람이 더 좋을 수도. 자신만의 리듬과 시선을 가진 사람의 매력.
근데 이게 악순환인 게...
몸은 혼자 운동해서 단련할 수 있지만..
사랑은 혼자 할 수 없다는 거...
그래서 아마추어와 초보는 평생, 또는 꽤 오래 그렇게 살고 프로와 숙련공은 언제나 일감이 그치지 않는다. 연애의 악순환이다. 양화가 양화를 부른다.
2011.11.07
기억으로 몸 덥히기
"당신 몸은 무척 탄력 있어 보여요." 노부인은 말했다.
....
"고맙습니다."아오마메는 말했다.
"나도 예전에는 그런 몸을 갖고 있었지요."
"알고 있어요." 아오마메는 말했다.
....
"지금도 멋진 몸이세요."아오마메는 말했다.
노부인은 가볍게 입가를 올렸다. "고마워요. 하지만 옛날과는 비교
할 수 없지요."
아오마메는 거기에는 응대하지 않았다.
"나는 그 몸을 몹시 즐겼고 상대도 몹시 즐겹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요?"
"알아요."
"어때요, 당신은 즐기고 있나요?"
"가끔." 아오마메는 말했다.
"가끔으로는 부족할 거예요." 노부인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말했다.
"그런 건 젊은 시절에 열심히 즐겨둬야 해요. 마음 가는 데까지. 나이 들어 그런 일을 할 수 없게 된 다음에는 예전 기억으로 몸을 따스하게 덥혀야 하니까요."
<1Q84 - 1권 - pp340~341에서 발췌>
다 읽은 1,2 권을 갖다 주기 전에 내가 표시해놓은 부분을 옮긴다.
공감을 넘어 내 생각을 누가 훔쳐간 듯한 느낌을 받은 부분이다.
친한 후배에게 늘 하는 말이다. 사랑은 근육 단련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쉬지 말아라.
좀 삶이 부유해지고, 여유를 찾고, 지위가 높아진 다음에 사랑하고 결혼할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건 오판이다. 그때는 이미 "사랑 근육"이 풀어져서 가장 쉬운 동작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그 근육이 마음에 있는 것이든, 몸에 있는 것이든 간에 말이다.
기억으로 따스하게 몸을 덥힌다, 는 부분이 쓸쓸하게 읽혔다. 나라는 육체의 현시를 어느 누구-심지어 부인조차-도 쾌락의 존재로 응시하지 않게 될 나이가 되면 나도 저렇게 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