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시가 넘었는데 왜 안자나.”, 아내가 걱정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봤다. 딸이 패드를 켜 놓고 뭔가 하고 있었다. 유튜버 흉내를 내고 있었다. 열한 시가 넘었으니 자라고 했다. 알았다며, 손짓으로 나가라고 했다. 아이들은 흉내를 내면서도 실제처럼 몰입할 수 있다. 십 분쯤 지났을까. 방문 밑으로 여전히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자라고 한 뒤 불을 껐다. 딸은 패드를 들고 나오며 울먹였다.
다음 날 아침, 수능일, 딸은 아홉 시 반으로 등교 시간이 한 시간 늦춰졌다. 지난밤, 늦게 잠든 이유다. 그러나 아내의 직장은 명절이라고 해서 일찍 끝나는 회사도 아니고 수능이라고 늦게 출근하는 회사도 아니다. 주말을 제외하면 언제나 같은 시간에 일어나 두꺼운 요가 매트에 누워 허리를 풀고 씻고 단장을 하고 정확히 7시 25분에서 30분 사이에 출근한다. 단 한 번도 지각도, 결근도 한 적이 없다. 그런 긴장감은 퇴근 후나 주말에만 풀어놓는다. 주중에 그런 긴장감을 내려놓는 건 그런 삶을 살아온 아내도, 그런 아내를 지켜본 나도 용납되지 않는다.
자기 전 살짝 울었다고 부은 눈을 한 딸과 등교를 했다.
보행신호를 기다리며 딸에게 물었다. “너 어제 왜 운 거야?” 말이 없다. “이유가 없어?”, 다시 물었다. 한참 후 답이 머뭇대며 온다. “아빠가 불 끄고 나갔잖아.”, 억울할 수 있다. 횡단보도를 건넜다. 두 번째 횡단보도를 건넌 후 학교까지 가는 길은 박물관 담장과 조각공원을 끼고 쭉 이어진다.
서운함이 남았는지, 아빠가 무슨 질문을 할지 몰라 난감해서인지 발걸음을 서두른다. 앞서 간다.
“너 혼자 갈래?”
“아니.”
“그렇게 갈 거면 혼자 가도 돼.”
“아니 아빠랑 같이 갈래.”,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은채야, 너처럼 예쁘고 키 크고 어느 정도 머리 좋은 사람은 적당히 해도 살 수 있어. 적당히 공부해서 부산의 적당한 대학 들어가서 적당한 직장에 취업해서 적당한 남자 만나서 적당히 만족하고 살면 돼. 그러나 네가 책이나 TV에 봤던 훌륭한 사람처럼 되고 싶으면 적당히 하면 안 돼. 친구들처럼 그러면 안 돼. 너 아빠가 문 열고 들어가면 열에 아홉은 휴대폰이나 패드로 영상 보잖아. 그렇지?”
“응.”
“물론 아빠도 그런 거 봐. 그런데 볼 때마다 무서운 건, 시간이 엄청 잘, 그리고 빨리 간다는 거야. 무슨 소린지 알아? 시간이 그냥 휙 가버린다고.”
“맞아.”
“은채야. 네가 적당히 사는 적당한 사람이 되기 싫으면 적당히 공부하면 안 돼. 친구들처럼 보고 싶은 영상 다 보면서 시간을 보내면 안 돼. 알았지?”
이런 대화 끝에 앞으로 학습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잠시 쉰 뒤 일곱 시 반에서 아홉 시 반까지, 대략 두 시간 정도, 숙제나 과제가 아닌 순수하게 책을 읽거나 참고서를 공부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예전 대학교 시절, 기숙사에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관장님은 3류 대학 와서 1류 대학 애들처럼 놀면 평생 3류로 산다면서 그런 시간을 만드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냉혹한 말이다.
난 착한 아빠는 아니다. 딸 바보도 아니다.
딸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는 그런 아빠는 아니다. 딸의 애교에 마음이 녹아 지갑을 통째로 건네주는 그런 아빠도 아니다. 사람들은 카피라이터라고 하면 무지하게 감정이 풍부하고 감성적일 거라고 생각해서 딸도 그렇게 키울 거라고 지레짐작하지만, 난 그런 카피라이터는 아니다.
아니, 카피라이터는 애초에 그런 인간이 아니다. 카피라이터는 설득의 대상으로부터 원하는 효과를 얻기 위해 꼭 필요한 표현을 찾는 사람이다. 말과 글에게 일을 시켜 기업이 돈을 벌게 하는 사람이다. 20초 광고와 3분 홍보 영상에 몇 글자를 읽을 수 있는지 따져보는 사람이다. 표현하고 싶은 이미지나 콘티가 있어도 광고주의 예산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해서 그에 맞게, 그러나 최적의 효과를 내는 이미지와 카피를 찾는 사람이다. 카피라이터는 애당초 감성적인 아빠, 딸 바보가 되기엔 글러먹은, 너무 이성적인 사람이다.
좀 큰 뒤로는 무조건적인 칭찬이나 내 자식이 최고야, 같은 말을 해준 적도 없다. 딸이 어릴 땐 놀아달라면 놀아줬지만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한 후부터는 집에서도 아빠는 일할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정확하게 가르쳐줬다. 한 집에 있어도 아빠가 서재에서 뭔가를 하고 있으면 그건 그 나름대로 아빠에게 중요한 일이라는 걸 가르쳐줬다.
딸이 뭔가를 배우거나 도전하려고 할 때도 정확한 목적과 필요를 얘기해 줬다. 요즘 딸은 영작문 책을 사서 기초 영작문을 연습하고 있다. 영어 학원 다니는 친구가 영작문을 공부한다고 자기도 하겠다고 나서서 사줬다. 그게 어디에 필요한 거 같으냐고 물었다. 딸이 정확히 알 리 없다.
“너 저번에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했지?”
“응.”
“아빠가 대학에서 공부할 때 유학 갔다 온 선배나 교수님 얘기 들어보니까. 다른 것보다 숙제하는 게 제일 어렵다더라.”
“숙제?”
“응. 영어로 숙제를 해야 하니까.”
“아~.”
“말이나 듣기는 살다 보면 되지만 다른 언어로 글을 쓴다는 건 그야말로 다른 차원이지. 그러니까 너도 유학 가서 고생 안 하려면 착실히, 꾸준히 공부해.”
“알았어.”
학기가 바뀌기 전, 방학 때마다 미리 사는 참고서와 문제집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사고 싶어 해서 매번 사주지만 이걸 왜 꾸준히 해야 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지금 다른 사람보다 앞서 가기 위해서 이걸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뭔가를 해서 그 누적의 힘으로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해줬다. 농구를 가르칠 때도, 롱보드를 가르칠 때도, 타바타를 가르칠 때도 그렇게 명확한 목적과 이유를 말해줬다. 그저 하고 싶다고 해서, 애가 사달라고 하니까 사주거나 시킨 적은 없다.
아내나 나나 원만한 사람은 아니다.
어디 가서 착하고 순하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다. 긴 연애와 십오 년 넘게 부부로 살면서 21세기를 함께 보냈다. 그래도 여전히 싸울 때가 있다. 물론 일 년에 두세 번 정도고 싸움이라고 해 봐야 긴 토론 비슷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팽팽한 긴장감이 거실을 가득 채울 때가 있다. 딸도 엄마 아빠가 첨예한 의견 대립 중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문제가 있지만 해결을 위해 답을 찾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 낫다. 열한 살짜리 소녀에겐 거짓말이 안 통한다.
그렇다. 거짓말이 안 통하는 시간이 왔다. 꿈을 말할 때 “넌 할 수 있어.”, “오 그거 멋진데.”하며 무조건 격려해 주고 응원해 주는 나이는 초등학교 1, 2학년 때까지 아닐까? 솔직히 2학년만 돼도 한 반에서 우열이 가려진다. 아이들도 알고 선생님도 안다.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내의 친구는 3학년 때의 성적이 평생을 간다고 냉정하게 말한 적도 있다. 딸은 하고 싶은 것도, 잘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지금까진 노력하면 어느 수준에 도달했지만 더 나이가 들면 천부적인 재능과 두뇌의 차이로 인해 극복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한 번의 패배에 쓰러지지 않고 다시 노력이라는 끈을 다잡아 멜 수 있도록 지금 목적과 목표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그날, 하굣길이었다.
“은채야, 아빠가 칼럼 쓴 지 이제 몇 년 안 됐잖아. 그래서 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책을 좀 제대로 읽어야지 결심하고 작년에 열심히 읽었거든. 50권 좀 넘었어. 그래서 올해 몇 권을 목표로 했는지 알아? 백 권이었어. 될 것 같더라고. 그런데 지금까지 몇 권 읽었는 줄 알아?”
딸이 올려다봤다.
“육십 권 정도 돼. 제법 부지런하게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런데 목표나 계획이 없었다면 그것도 못 읽었겠지? 목표를 세우면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근접할 수는 있어. 그러니까 은채도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해. 이제 곧 방학이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다 하고 흐지부지 보내지 말고.”
딸이 알아들었을까?
토요일 오후, 딸이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주산을 배우는 날이다. 덕분에 그전에는 일 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했던 백화점을 매주 가고 있다. 이번 주도 두시 사십 분에 집을 나섰다. 2,3분 걸었을까. 딸이 멈칫했다.
“아, 택 안 들고 왔다.”
교통카드가 들어간 택 지갑을 목에 걸고 오는 걸 깜빡한 것이다. 딸은 다시 집에 돌아갔다 왔다. 지하철역에 다다랐을 때쯤, 요즘 농담처럼 자주 하는 말을 했다.
“딸,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알았어.”하며 웃는다.
한마디 덧붙였다.
"딸, 스포츠든 사람이든 완벽한 사람이나 팀이 이기는 게 아니야. 실수를 줄이는 사람과 팀이 이기는 거야. 너나 나나 정신 차리자. 알았지?”
친구 같은 아빠, 딸 바보의 사용 연령은 정해져 있다.
학교 가면 친구는 많아진다. 딸이 크면 딸은 아빠에게 인생의 답을 원한다. 치어리더보다 전체 판세를 보면서 냉정하게 조언해 줄 감독이나 코치를 원한다. 사랑은 사랑대로, 꿈을 향해 함께 가는 동반자는 동반자대로, 그렇게 아빠의 역할은 많아진다. 그러나 자식을 사랑하는 법을 몰라도 사랑을 할 수는 있지만 딸의 꿈을 현실로 만드는 괜찮은 동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은 부지런히 애쓰지 않아도 마음속에서 쑥쑥 자라지만 딸의 성장을 돕는 길잡이가 되는 법은 애를 써야 터득할 수 있다. 친구와 바보의 시간이 끝나면 노력과 훈련의 시간이 딸과 아빠 앞에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