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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Yeo Oct 11. 2024

2화. 그 많은 눈을 다 뚫고 와서

엄마는 아주 추운 겨울에 날 홀로 낳았다 했다. 

12월 1일, 그것도 너무 추운 새벽 3시에 차디찬 화장실 타일 위에서. 

핏덩이인 날 끌어안고 간신히 물수건으로 날 닦아내자마자 뱉은 엄마의 첫마디는 ‘희다’였다고 한다. 

막 태어난 아이의 피부가 너무 희다고. 

처음 이 이야길 들었을 땐 세상에 나오느라 하도 고생을 해서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보고 엄마가 뱉은 말이 아닐까 싶었지만, 나는 지금도 만인이 부러워하는 희고 깨끗한 피부의 소유자다. 

“네 이름이 그래서 ‘설’이야. 눈 설(雪) 자를 써서 설이. 하필 또 엄마가 ‘백’씨네? 엄마가 폭신폭신한 백설기 떡을 하도 좋아해서, ‘설기’라 지으려 했는데... 그건 너무하잖아?”
엄마는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듯 눈을 감기도 하고, 날 쓰다듬기도 하며 몇 번이고 어린 내게 내 이름의 유래에 대해 알려주곤 했었다.

“엄마가 또 눈 오는 겨울을 참 좋아하거든. 핸썸한 니네 아버지도 함박눈이 펑펑 오는 겨울에 처음 만났고, 우리 설이도 엄마랑 눈 오는 겨울에 처음 만났고. 설이는 좋겠다! 이름이 예뻐서.”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난 그다지 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었고, 늘 짜증을 내며 같은 대답으로 반박하곤 했었다. 

“난 싫어! 애들이 백설 공주 어쩌고 하면서 놀린단 말이야.”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만 이런 내게 늘 호탕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어머머! 얘! 애들이 공주라 하면 난 땡큐~ 하겠다! 떡보단 공주가 낮지! 안 그래?”

아니, 난 차라리 떡이 나을 수도 있겠다 여러 번 생각하곤 했다. 

진짜 공주가 공주라 불리면 놀림이 아니지만, 내 주제에 초등학생 정도면 다 아는 동화 속 백설 공주와 같은 이름을 써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야, 너네 집엔 진짜 아직도 컴퓨터가 없어?” 

막 컴퓨터라는 물건이 이 집, 저 집 너 나 할 것 없이 들어오기 시작하던 그맘때였다. 

옷장도 못 들어가는 나와 엄마의 작은 단칸방에 컴퓨터라는 물건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일 땐 어찌어찌 숨겨봤는데, 내가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엔, 컴퓨터는 부잣집이 아니어도 당연히 집에 있어야 하는 물건이 되어 있었다. 

남들은 다 집에서 프린트 해오는 주간 시간표를 선생님이 내게만 매번 직접 프린트를 해서 가져다주시니 티가 난 것이었다.  

“푸핫! 백설 공주가 아니라 완전 거지 아냐? 얜 뭐 없는 게 이렇게 많아?”

같은 반 남자아이의 말에 창피해진 나의 희고 흰 얼굴이 순간 토마토처럼 빨갛게 변했다. 내가 이토록 수치스러움을 느꼈던 이유는 이 머저리가 날 ‘거지’라고 불렀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없는 게 많은 아이란 걸 들켰기 때문이었다. 

학교에 다니며 자연스레 느끼게 된 것이지만, 내겐 정말 없는 것이 많았다. 

특히, 컴퓨터처럼 다른 또래 아이들에겐 당연히 있는 것 중 없는 것이 많았다. 

예를 들면 엑스박스인가 뭔가 하는 게임... 폴더 폰... 메이커 운동화... 그리고... 아버지.




“엄마한텐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지!”
엄마는 아버지 얘길 하는 걸 좋아했다. 

학교에서 고작 컴퓨터가 없어 치욕을 당하고 돌아온 그날, 난 처음으로 다짜고짜 엄마에게 따졌었다. 

왜 난 아버지가 없냐고. 남들 다 있는데 왜 나만 없냐고. 

엄만, 처음엔 좀 당황하더니 이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우리 설이가 벌써 다 컸네. 그런 것도 묻고. 자, 여기 앉아 봐. 설이한테 아버지가 없긴 왜 없어? 엄마가 얘기 다 해 줄게.”

어린 시절 처음 엄마에게 들은 아버지 얘긴 낭만적이고, 아름답고... 다소 짧았다.

두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오래전, 눈이 펑펑 오던 겨울날 한 치킨 집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다. 

엄마 말에 의하면,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알았다고 한다. 

서로가 운명의 사랑임을.

“눈이 너무 와서인지... 그날따라 초저녁부터 손님이 한 명도 없었어. 주인아주머니도 일찍이 나한테 맡겨두고 가버렸고. 막 셔터 닫으려는데 네 아버지가 들어온 거야. 딱 반 마리만 좀 튀겨줄 수 없겠느냐고. 군복 차림에 기껏해야 스무 살 정도 밖에 안 되어 보이는 네 아버지가...그 많은 눈을 혼자 다 맞았는지 벌벌 떨면서. 딱 보니 휴가 나온 것 같았는데 어디 갈 데도 없었던 모양이야. 여하튼 달라는 대로 반 마리만 튀겨 줬더니 눈 깜짝할 새에 다 먹었더라고. 벌써 뼈 밖에 안 남은 그 반 마리를 아끼고, 아껴 빨아먹고 있는데 그게 너무 안 된 거야. 딱 봐도 나보다 대여섯 살은 어려 보였는데... 내 월급에서 까버리지 뭐, 하고 그냥 또 한 마리 채로 튀겨줬지. 그랬더니 그 큰 닭을 막 욱여넣다 목이 메는지 자꾸 기침을 해. 그게 또 안 되어서 내가 맥주 한 병을 가져다줬어. 내친김에 뻥튀기도 좀 더 내오고. 자꾸 마음이 쓰여서 어느새 옆에 앉았는데... 그 사람 피부가 너무 희고 곱더라? 난 맨날 기름에 그을려서 시커먼데, 그 사람의 뽀얀 얼굴에선 반짝반짝 빛이 났어. 저 얼굴에 내 그을린 입술이나마 잠시 데어 봤으면 좋겠다... 할 정도로. 흰 눈에 내 검고 못난 발자국이나마 남겨봤으면 좋겠다... 하고."

엄만 아빠의 희고 고운 피부를 묘사하며, 처음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행복해했다.
“한참 동안 닭이든 술이든 내가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더니, 배가 좀 차는지 입을 열더라고. 같이 밤새 얘기꽃을 피우는데 네 아버지... 어린 나이에 참 고생 많이 하고 살았더라고. 나처럼... 꼭 나처럼. 너무 가여운 사람이었어. 그래서 다가오는 그 사람의 입술을 거절할 수가 없었지. 그 사람의 손길도... 어머머! 내가 애한테 별 얘길 다 하고 있네! 아무튼... 동틀 무렵이었나...? 내리던 흰 눈은 멎었지만,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인 그 고요한 시점에 설이 네가 생겼을 거야. 삼신할머니가 그 많은 눈을 다 뚫고 와서 엄마한테 우리 설이를 데려다주신 거지.”


순수한 우리 엄마는 아마 당시에 내가 섹스에 대해 알지 못한다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등학생들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동네 만화방에 있는 저급한 만화 두 어 편만 보아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게 섹스였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 짧은 일화가 엄마와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주변이 완전히 밝아지기 전에, 흰 눈이 가득 쌓인 풍경을 뚫고 어딘가로 떠났고,

엄만 아버지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했으니까. 

훗날 나는 어른이 되어 생각했다. 

엄마도 참. 

그냥 기름 냄새나는 치킨 집에서 이름도 모르는 남자와 외로워서 원나잇을 했다 했음 되었을 것을. 

나는 단 한 번의 섹스로 예고 없이 생겨 버린 자식이다 말해 주어도 되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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