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내 나이 또래 사람들은 결혼과 출산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나의 10대가 끝나갈 무렵부터, 저 출산 문제에 대한 다소 강압적인 정책이 본격적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남자의 경우, 스물셋이 되기 전에 짝을 이뤄 아이를 낳으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됐다.
아이를 낳기만 해도 매년 얼마 이상의 지원금이 지급되었다.
이 지원금은 당연 현재의 나처럼 서른이 되었는데도 아이를 낳지 않은 나 같은 사람들에게로부터 떼어 간 세금으로 지급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몇 세 이전에 아이를 낳으면 각종 혜택이 지원되었듯이,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에 따른 페널티가 부여되었다.
온갖 광고, TV 프로그램, 게임 등에서는 아이를 선택적으로 가지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갔다.
나 같은 사람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등지고 나만 편히 살겠다 선택한 아주 이기적인 사람으로 인식되기 쉬웠다.
무정자증이거나, 임신을 할 수 없는 신체 조건을 가진 사람들은 아예 장애인으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세금을 더 내는 등의 단순 페널티는 피할 수 있었으나, 사회로부터 뭔가 하자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시작했다.
콘돔이나 피임약의 가격이 껑충 뛰어올랐으며 섹스에 대한 인식이 지나치게 가벼워졌다.
금전적으로 새 생명을 책임질 수 없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성년자 출산율이 빠르게 증가했다.
때문에, 세상에 버려지는 아이들도 많아졌다.
사람들은 신중하지 않게 관계를 맺고, 우연히 생긴 생명은 사회가 알아서 하겠지라는 식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나처럼 한 부모 가정에서 태어나거나 아예 고아 신세가 되는 아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분명 뭔가 잘못되었는데도, 언제인가부터 저출산 정책 반대론자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숨어 버린 걸까?
“분명히 나한테 약속했잖아. 결혼 안 해도 된다며! 넌 나만 있으면 된다며!"
내 나이 스물하나에 만나 약 3년을 사귄 내 첫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자,
나는 이렇게 울분을 토해냈었다.
내 첫 남자친구는 집안 사정, 학벌 등 나와 여러모로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크게 잘난 거 없는 사람이었지만, 처음이었기에 그와 함께라면 행복했다.
나는 사랑하는 첫 남자친구에게 모든 것을 털어두었었다.
아버지의 부재, 늘 부족했던 주머니 사정,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까지 줄줄 털어놓으며 내가 결혼이든 아이든 가까운 미래에는 생각이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했었다.
나는 왜 나의 엄마가 한 선택을 반복할 수 없는지,
나는 왜 문어가 될 수 없는지의 이유를 진심을 다해 털어두었다.
“결혼? 그딴 절차가 뭐가 중요해. 난 너만 내 곁에 있으면 돼. 약속할게.”
꼬시려거든 무슨 말을 못 했을까?
내 첫 남자친구는 당시, 사랑에 눈이 멀어 내게 약속하면 안 되는 약속을 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었고, 우린 잠시 동안 행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생각은 바뀌어갔다.
“설아, 미안해. 난 이제 결혼이 하고 싶어. 더 나이 들기 전에 날 닮은 아이도 갖고 싶고. 인간이라면 그게 당연한 거 아냐? 너야말로 날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내 아이를 원하지 않을 수 있어?”
난 반박할 수 없었다.
사랑하면 보통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 하던데.
난 왜 그를 그렇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을까?
첫 남자친구가 떠나고, 나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었다.
홧김에 그와 확 결혼해버릴까?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역시 난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나는 사랑에 빠질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와 달리 안락하고 풍족한 삶을 살아온 남자를 우연히 만나게 된 계기도 한 번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내게 솔직히 말했었다.
대학도 나오지 않은 여자와는 부모님 반대가 심해서 결혼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날 만나는 보고 싶으니 선택은 내가 하라고.
지금과 같이 당시에도 결혼 생각이 없었던 나는 흔쾌히 연애용 연인이 되는 쪽을 선택했고, 6개월 뒤 그와 깔끔히 이별했다.
그는 나와 헤어지자마자 비슷한 조건의 여자와 선을 봐 빠르게 결혼했다고 한다.
씁쓸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 관계는 나에게 서로 원하는 것이 처음부터 솔직한 것이 딱히 나쁠 것도 없다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리고 그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레스토랑 손님으로 영웅이를 처음 만났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영웅이가 나를 결혼 상대로는 생각해 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여 일부러 그에게 다가갔다. 전형적인 나쁜 여자로 비칠 수도 있겠으나, 언제나 버려지는 쪽은 나였기 때문에 큰 죄책감은 느끼지 않았다. 나는 영웅이와 첫 데이트를 한 그 호텔 커피숍에서, 첫 남자친구에게 그랬듯 일부러 영웅이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내가 자라온 환경, 엄마와의 이별, 지금 나의 대략적인 상황까지.
이제 곧 서른이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결혼 생각이 없다는 것도,
나는 근 미래에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것도 강조했다.
그렇게 긴 넋두리를 끝내고, 나는 영웅이의 반응을 살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영웅이가 선택을 할 거라 생각했다.
아, 이 여자는 안 되겠네.
혹은 아, 이 여자는 마지막으로 놀기 좋겠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난 상관없었다.
서로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도 차라리 내게 솔직히 말해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던 영웅이는 인자하게 웃으며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얘기 잘 들었어요. 근데 설이 씨가, 설이 씨라고 불러도 되죠? 아무튼 저는 아직 설이 씨가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밖에는 몰라서요. 저는 설이 씨가 음식은 뭘 좋아하는지, 요즘 즐겨 듣는 노래는 뭔지, 색깔은 뭘 좋아하는지, 뭐 그런 게 일단 궁금해요. 영화 좋아해요? 다음에 만나면 우리 영화 보러 갈까요?”
나는 이미 ‘나’를 다 말해준 줄 알았는데.
나를 알아가고 싶다는 영웅의 대답은 날 당황시킨 나머지 내 고개를 저절로 끄덕이게 했다.
나는 다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내 아이를 원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