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고, 나도 그런 영웅이를 사랑하게 됐다.
영웅이가 정확히 언제부터 날 사랑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겠으나, 난 정확히 기억한다.
내가 영웅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을.
그와 교제를 하기 시작한 지 두어 달쯤 지났을 때였다.
무더운 날씨에 영웅이는 내게 수영장에 놀러 가지 않겠느냐 물었었다.
난 수영장 물에 발만 담그려는 생각으로 그러자고 했다.
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배운 적도 없었고, 배울 기회도 없었다.
그리고 수영장에 가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웅이는 펄쩍 뛰며 내게 말했다.
“설아, 살면서 수영은 꼭 배워 둬야 돼! 내가 없을 때 갑자기 물에 빠지면 그땐 어떡하려고 그래?”
살면서 그런 일이 과연 몇 번이나 있을까 속으로 생각했지만, 내게 수영을 가르치겠단 의욕이 넘쳐 보이는 영웅이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수영을 잘 하는 영웅이는 매우 좋은 선생님이었다.
물에 뜨는 원리부터 기본 발장구를 치는 방법까지 차근차근 내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모든 게 처음이었던 나는 자꾸만 물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자꾸만 물을 먹었다.
몇 번 매운 수영장 물을 먹고 나니, 나는 지레 겁을 먹기 시작했다.
겁을 먹으니 몸에 힘이 들어가며 자꾸만 더 깊이 가라앉는 현상이 악순환 됐다.
하지만 영웅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 몸이 가라앉으려 하면, 그는 물 밑에서부터 나를 들어 올려 내 몸을 수면 위로 띄워주었다.
차츰 긴장이 풀리며, 나는 물에 뜨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꾸 내 몸을 띄워 올려주는 영웅이의 손길이 좋아서, 가끔은 일부러 가라앉기도 했다.
내가 조금만 가라앉아도, 영웅이는 때를 놓치지 않고 나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물속 위, 그 짧은 순간마다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영웅이와 함께라면, 깊고 어두운 그 어딘가로 가라앉을 일은 더 이상 없지 않을까? 그때 알았다.
나는 이 남자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 남자에게 무척이나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불안했다.
곧 이 남자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너무나 간절히 원하게 될까 봐.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소리 하고 있네! 어이, 백설! 야 이 지지배야! 정신 차려! 영웅 씨 같은 남자가 결혼하자 그러면 맨발로 뛰쳐나가서라도 해야지!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
며칠 전, 난 내 서른 번째 생일을 앞두고 영웅이가 프러포즈를 준비하고 있단 사실을 눈치챘다.
이 사실에 대해 고민이랍시고 털어놓자 은경 언니에게 들은 핀잔이다.
“언니한테 욕 얻어먹을 줄 알았어.”
“미친년. 너 내일모레 서른이야. 말 그대로 내일모레. 설아, 영웅이 만한 애 없어. 응? 진짜 잘 생각해 봐.”
나는 날 친동생처럼 생각하는 은경 언니의 마음이 뭔지 잘 안다.
은경 언니는, 괜히 내가 때를 놓쳐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인 것이었다.
“설아, 언니 말 잘 들어. 지금이야 네가 아쉬운 거 같아도... 나중에 되면 진짜 하고 싶어도 못해. 평생 20대 청춘이 아니잖아? 언니 꼴 나지 말고, 진짜 잘 한 번 생각해 봐. 응?”
언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걱정했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나랑 결혼하자, 설아.”
내가 서른이 되기까지 불과 몇 시간밖에 남지 않은 지난밤, 영웅이는 내게 프러포즈를 했다.
예상했던 일이기에,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됐어.”
내 무뚝뚝한 반응에 번쩍이는 다이아반지까지 준비한 영웅이의 표정이 당황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난 안다.
영웅이는 나와 사귀고 처음으로 단단히 토라져 있다는 것을.
[새로운 메시지 없음]
기분만 더러워진 유혁과의 술자리를 급히 마무리하고,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애꿎은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어젯밤 허무하게 돌아간 영웅이는, 내 서른 번째 생일날이 끝나 버린 지금 시간까지도 연락이 없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마음도 좋을 리 없었다.
그의 마음을 풀 수 있는 열쇠를 내가 손에 꼭 쥐고 있다는 점이 더 마음이 아팠다..
피곤한 몸으로 집 앞에 도착하니,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영웅아.”
벽에 힘없이 기대어 있는 영웅이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술 냄새가 났다.
“추운데 이 시간에 여기서 뭐해. 전화라도 하지.”
내 말에 영웅이는 슬픈 눈을 하고 날 바라봤다.
나는 일부러 영웅이의 시선을 피하며 그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여기 좀 앉아. 물 좀 마시고.”
영웅이는 내 말에 순순히 따르며 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나랑 왜 결혼하기 싫어?”
“싫은 게 아니라 준비가 안 됐다고 했는데.”
“준비 다 하고 결혼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무튼. 난 준비가 안 됐어.”
나는 일부러 담담함을 유지하며 영웅이에게 말했다.
“설이 너 나랑 결혼 안 할 거잖아.”
영웅이는 이미 나의 대답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영웅이는, 내가 아직 결혼할 수 없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내가 이영웅과 같은 완벽한 남자와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영웅. 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한테 다 말했어. 결혼 생각 없고, 앞으로도 하고 싶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속상한 나머지 말이 공격적으로 나가고 말았다.
자꾸, 나 억울한 점만 말하게 되면 안 될 텐데.
그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네 말대로 그건 처음 만났을 때잖아! 그땐 서로 사랑하기 전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근데 백설! 너, 나 사랑하잖아. 나 사랑하게 됐잖아. 결혼해도 달라지는 거 하나도 없는데 왜 자꾸 밀어내는 거야?”
“봐. 이영웅 너도 오만했던 거야. 나랑 만나면서 내 생각과 가치관을 바꿀 수 있다고 자신 한 거잖아. 내가 언젠간 마음을 바꾸겠지라는 생각으로 날 만난 거잖아. 결혼하면 달라지는 게 없어? 그럼 안 하면 되잖아. 애도 지금은 안 가져도 된다고 하겠지. 말만 그렇게 하고 결혼하면 몇 년 뒤에 또 아이 갖자고 이렇게 시위할 거 아냐?”
내가 쏘아붙이자, 영웅이는 진심으로 상처받은 듯했다.
마음이 아팠다.
영웅이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 설이 네가 사회적으로 무시당하지 않아도 되잖아. 부당하게 수익이 줄 일도 없고, 그거 외에도 많은 것들이 편리해지잖아.”
영웅이의 말에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나 좋자고 결혼해 주는 거다, 이거야? 넌 그냥 날 가지고 싶은 것뿐이잖아. 서류상으로라도 그렇게 박아놔야 네 마음이 편할 거고! 그냥 빨리 남들처럼 애 낳아서 소꿉놀이하고 싶은 거잖아! 그럴 거면 처음부터 딴 여자 만나지 그랬어!”
자꾸 말에 원하지 않은 가시가 돋아 나갔다.
내 성질에 결국 영웅이의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그래! 너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 사랑하는 여자랑 결혼하고 싶은 게 이상한 거야? 너 닮은 딸아이 갖고 싶다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거냐고! 백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너니까 원하는 거야. 결혼이든 애든 다 너랑 이어야 한다고!”
영웅이의 말이 끝나고, 잠시 동안의 정적이 공간을 채웠다.
영웅이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이 관계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
힘이 빠진 영웅이를 꼭 품에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
앞으로 영영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난 알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영웅이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긴 숨을 들이 마시고 입을 열었다.
“영웅아, 나는 문어가 될 수 없어.”
영웅이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말을 이어가는 내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 나 키우면서 하도 고생을 해서... 나도 똑같은 선택이나 하라고 날 이렇게 죽기 살기로 키우진 않았을 거야. 나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스스로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아. 공부도 더 하고 싶고, 뭔가 훌륭한 일을 해내고 싶어... 여행 가서 이 망할 출산법이 없는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도 보고 싶고, 자유롭게 떠돌아다녀보고 싶어. 서른이 된 지금에서야 하고 싶은 일을 해 볼 수 있게 생겼는데 아직 나는... 가정을 이루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살아갈 자신이 없어 영웅아... 죽은 우리 엄마한테 미안해서... 나는 될 수 없어...”
내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알겠어. 그럼 기다릴게. 10년이고 20년이고, 네가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영웅이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당장에, 그리고 앞으로도 과연 문어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기약 없는 잔인한 기다림을 영웅이에게 줄 순 없었다.
나는 확신했다.
이토록 반듯하고 줄 수 있는 사랑이 많은 남자는, 똑같이 사랑을 많이 줄 수 있는 여자를 만나야 한다.
나처럼 받은 사랑이 이리 많은데도 꽁꽁 싸매고 조금도 주려 하지 않는 여자가 아니라.
고개를 젓는 나를 보는 영웅이의 얼굴에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영웅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백설. 너, 비겁해. 지금 보니, 설이 넌 날 사랑한 게 아니었네. 내가 단단히 착각한 거였어. 네가 날 사랑했다면 몇 년이고 염치없이 기다려 달라 했어야 맞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겠냐고 물었어야 맞다고. 설이 넌,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 내가 기다리는 게 부담스러운 거야. 내가 진짜 기다릴까 봐 겁나는 거라고. 날 사랑한다면 절대 나한테 이럴 수 없어.”
영웅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서버렸다.
그리고 나는 많이 슬펐다.
방금 내 곁을 떠나버린 저 남자만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남자는 앞으로 없을 걸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