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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Yeo Oct 11. 2024

9화. 행복

며칠 뒤, 레스토랑으로 출근한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직원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다른 사람의 시선에 민감한 내가 못 알아차렸을 리가. 

뻔했다. 

내게 거절당하고 자존심이 바닥을 친 유혁이 내 나이에 대해 떠들고 다녔을 것이다. 

사실 비밀리에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둥, 헤프게 사느라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둥 자기 편한 쪽으로 지껄이고 다녔을 것이 훤히 보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오랜 시간 고민해온 일을 비로소 실행하기로 마음먹은 뒤였으니까.

“그만둔다고? 지난주에 나랑 계약서 쓸 때만 해도 자기 이런 말 없었잖아! 진짜, 숨겨둔 애인이랑 결혼이라도 하기로 한 거야?”
내가 사직서를 제출하자, 지점장은 펄쩍 뛰며 내게 물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오래전부터 준비하던 일이 있어서요.”

날 묘하게 바라보는 지점장, 

그리고 부엌에 숨어 내 눈치를 살살 살피는 유혁을 뒤로하고 나는 당당히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앞으로 한 달은 더 일해야 하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다. 

한 달이 지나고 나면, 내게 주어진 시간은 온전히 나의 것일 테니까. 




“은경 언니! 추운데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먼저부터 나와 날 기다리고 있는 은경 언니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
“춥다 추워. 얘, 감기 걸려. 얼른 들어가자. 이야~ 여기가 아직도 운영을 하네, 그래.”

우린 한 겨울에 아쿠아리움을 찾았다. 

나의 십대가 막 끝나버렸던 그 무렵, 많은 위안을 받곤 했던 바로 그 아쿠아리움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아쿠아리움은 이상하게 작아 보였다. 

물고기 종류가 이렇게 적었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다채롭지 못한 작은 아쿠아리움이었지만, 가족 단위로 구경 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엄마! 나 저기 거북이 보고 올래!” 

우리와 가까이 서 있던 한 어린 소녀가 말했다. 

은경 언니는 두 눈을 반짝이며 거북이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는 어린 소녀를 조금 슬프게 바라보았다. 

아마, 엄마 없이 자라야 할 민희 걱정을 하는 거겠지. 

나는 언니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언니, 나한테 문어 엄마 이야기해 준 거 기억나?”

“누구 엄마 얘기?”
“문어 엄마 이야기 말이야. 언니, 여기서 청소하다 말고 나한테 별의별 얘기 다 해줬었잖아. 기억 안 나?”
“어우 야, 아줌마 되고 나니까 오늘 점심에 뭐 먹었는지도 생각 안 나, 야.”

“잘 좀 생각해 봐. 새끼 문어들이 태어날 때까지 알을 지키는 어미 문어 얘기 말이야! 내가 언니 앞에서 막 울었는데! 진짜 기억 안 나?”
은경 언니는 그제 서야 기억이 난다는 듯이 내 어깨를 찰싹 때렸다.
“기억난다! 설이 네가 울었다 하니 기억이 나. 그래... 문어는 원래가... 그 어떤 생물보다도 모성애가 강한 동물이긴 하지. 자기 자신을 그렇게 가혹히 희생시키면서까지 제 새끼들 지키겠다고...”

은경 언니의 말을 듣자마자, 엄마의 잔상이 나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잘 먹지 못해 뼈만 앙상했던 엄마의 몸.
시커멓게 그을린 엄마의 손.
나 까짓 거 하나 키워내겠다 혼신의 힘을 다한 후, 눈을 감은 그 여린 얼굴.

“언니, 어미 문어는 새끼 문어들이 어떤 삶을 살길 바랐을까? 아무래도... 자식들이 바닷속에서 멋지고 자유로운 삶을 살길 바랐겠지? 자기가 죽어가며 키워낸 새끼들이니까.”
나는 커다란 문어가 갇힌 수조 앞에 서서 은경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는 내 물음에 잠시 기억을 떠올리는 눈치였다. 

언니는 잠시 동안 눈앞의 문어와 여기저기 신기한 듯 돌아다니며 바다 생물을 구경하는 어린 소녀를 번갈아 보더니 내게 말했다.

“어미 문어는... 새끼 문어들이 언젠가 엄마가 되길 바라지 않았을까?” 

은경 언니는 너무나도 행복한 미소를 내게 보여주었다. 

“나, 내 딸내미 만나고 정말 행복하거든. 그 쪼그만 애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기쁘던지... 지금까지 미련하나 없던 이 세상이 아이라는 행복 하나 때문에 너무나 미련이 차고 넘쳐. 조금만 더 살고 싶을 정도로. 아이와 함께 맞이하는 아침이 너무 밝고 예뻐서. 내 품에 안겨 색색 잠드는 숨소리만 들어도 마치 구름 위에 누워있는 거 같아서.” 

어느새 내 손을 잡고 말을 이어가는 은경 언니의 손을 나도 더러 꽉 붙잡았다. 

“나는 아이를 얻고 내가 너무 행복해서 내 아이도 나중에, 아주 나중에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 내가 느낀 이 커다란 행복을 저도 언젠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서.” 

은경 언니의 말에 내 머릿속은 날 보며 행복하게 웃었던 엄마의 기억으로 가득 찼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날 보는 엄마는 늘 미소 짓고 있었다.

“그만큼 엄마로서 행복한 삶이었을 거 같아, 엄마 문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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