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약속한다는 건 기대가 아니라 다짐. 걸어온 길은 후회로 가득하고 걸어갈 길은 두려움뿐이지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이 길을 함께 걷겠다는 결심. 마주할 결말이 초라함 뿐이어도, 끝까지 앞으로.
<미지의 서울>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쉬는 날이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봤는데 아침부터 눈물을 펑펑 쏟아버렸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원래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나도 이제 사람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들을 알만큼은 인생을 산 건지, 아니면 지나온 힘든 과거와 그때의 감정들이 생각나서인지. 아마 둘 다 일 것이다.
마주할 결말이 초라함 뿐이라도 끝까지, 앞으로.
쏟아지는 눈물은 건조했다. 아무 감정이 없었다. 많이 울어봐서 안다. 보통 울 때는 마음이 아린다던지, 무언가 속에서 뭉클한 것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그냥 눈물이 났다. 속은 너무나 고요했는데 밖으로는 쏟아져내렸다. 하지만 어느 부분이 눈물샘을 터뜨렸는지는 안다. '초라함' 저 단어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는 저 말이 주는 용기에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인생은 동화가 아니니까
하나둘씩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그리고 너무나 뻔한 예기지만 나만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이제 뭐라도 되고 풀려야 할 나이에, 남들은 하나둘씩 무언가 빛이 나기 시작하는데 난 아직 시작도 못했다. 남들이 희망을 보기 시작할 때 난 절망을 보기 시작했다. 시작조차 하지 못한 나는 이미 망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겪어온 실패에 앞을 나서지도 못했다. 내 선택이 또 잘못된 선택이 될까 봐. 그래서 지금보다 더 큰 불운이 내게 찾아올까 봐.
무언가를 이루어내고 자신의 자리를 잡아가고 해피엔딩의 중간 결말쯤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했다. 난 작은 것 하나조차 안되고 안되는데 저 사람들은 복 받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근데 또 살아있으니 뭐라도 해야 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는 해야하는데 두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저 말이 용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나마 내 눈물의 의미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용기'라는 단어 같다. 마주할 결말이 초라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냐고. 떨고 있는 손을 잡아주는 말 같았다.
초라함을 마주할 용기
몸이 안 좋은데 실망스러웠다. 문맥상 안 맞는 문장이 아닌가. 몸이 안 좋은데 실망스럽다고? 그런데 맞다. 실망스러웠다. 애매하게 아픈 내 몸이 원망스러웠다. 약을 먹으면 버틸 수 있고, 나름 병치고 괜찮다는 병이 아주 많이도 원망스러웠다. '애매하지 않고 확실한 병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늦은 저녁 CT를 찍으러 병원에 갔다. 외래가 다 끝난 병원 로비에는 환자들이 많이 내려와 있었다. 환자들을 위한 공연도 하고 있었다. 따뜻했다. 병원에서 왜 따뜻함을 느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난 종종 느꼈다. 어릴 때부터 병원을 드나드는 일도 많았고 입원하는 일도 많았는데 병원이 싫지 않았다. 따뜻했다. CT 촬영을 마치고 커피 한잔을 사들고 나도 그 공연을 입원 환자들과 같이 보고 있는데 그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한 말이지만 병원을 떠나기 싫었다. 너무너무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그분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두꺼운 바늘은 열두 번은 더 꽂아봤으니 이제 이골이 나서 그것조차 무섭지 않았다. 그냥 내 몸이 좀 더 확실히 안 좋아져 병원에 입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너무 절실했다.
더 이상 밖으로 나가 초라함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몸은 이미 지쳤다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겨우겨우 조금 회복된 마음도 또 끝없이 떨어지게 될까봐 무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이상 힘이 없는데 일을 해야 한다는 게 끔찍했다. 출근하다가 도망가면 어떨까를 많이 상상한다. 멈추고 싶은데 용기가 없었다. 잠깐 멈추면 영원히 멈추게 될까봐. 또 내 결정이 틀렸을까봐. 여기서 더 초라해질까 봐. 그래서 중병이라도 걸려서 제발 나의 의지를 빌리지 않고도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딘가가 이상해 병원에 갈 때마다 그 생각이었는데 내 바람은 항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내 의지로 초라함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잔잔한 슬픔
사람이 너무 힘들면 마음속에 항상 눈물이 고여있다. 마치 물이 든 풍선 같다. 바늘로 한 번만 찌르면 바로 터져버릴 것이다. 평소에는 감정이 격해질 에너지도 없지만 그렇게 잔잔히 항상 슬픈 것이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쁜 것 같지는 않다. 잔잔할 때 많은 것들이 정리된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일 수 있다. 모든 것을 표출해 내야만이 하는 것은 아니다. 그걸 숨길 때 더 안전할 수 있다. 잔잔하다는 것은 지금 안전지대에 숨어있다는 것일 수도 있다. 힘을 빼고 잠시 안전지대에 갇혀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