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재계약 시즌이라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물건 시세 하락으로 상당한 난항과 곤욕을 겪고 있다. 은행과 중개인은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모두가 자신의 일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 나의 일을 해야 했다. 각자가 해야 할 일들을 해서 접점을 찾아야 한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대출을 갚지 못해 신용도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지 내가 왜 피곤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그렇게 발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는지 또 한 번 나를 자책하는 시간이었다. 사실 시세가 떨어진 것은 나의 잘못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결국 떨어진 시세의 갭차이를 맞추지 못한다면 결국 모든 손해는 내가 보게 된다.
차분함이라는 균형이 깨지는 것을 싫어하는데 이럴 때는 어김없이 깨진다. 난 역시 돈 문제에 민감하다. 더욱이 이런 일을 겪으며 다시 어릴 때의 나로 돌아갔다. 언제 돈 문제로 곤란해질지 모르니 공부고 뭐고 내 미래보다도 일단 지금 돈을 벌 수 있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회귀했다. 이렇게 환경이 무섭다. 나의 생각은 다시 주저앉았다. 내 주제에 뭘... 난 이렇게 태어났나 보다. 어차피 난 안될 운명인가 보다. 너무 힘들어 그만하고 싶다라고 스스로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지난날을 계속 후회했다. 돈과 관련된 단 하나의 사건으로 나의 생각은 다시 바닥을 쳤다.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집이 없으면 난 돌아갈 곳이 없고 의지할 가족도 없다.
거울을 보니 송장이 보였다. 올 초부터 시작된 구순염은 만성이 되어서 이제 연고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연고 말고는 입술에 아무것도 못 바르는데 구순염으로 입술은 붓고 간지럽고 색은 완전히 없어졌다. 피부도 화장만 하면 뭐가 자꾸 올라와 맨 얼굴로 다닌 지 꽤 오래되었다. 렌즈도 눈이 너무 아파 더 이상 낄 수 없다. 라식을 해야 하는 눈이었다. 하지만 내 불안한 인생에 라식에 돈을 쓰는 건 사치였다. 누군가는 20대에 라면을 먹는 건 창피한 게 아닌데 30대에도 라면을 먹고 있으면 처량한 거라도 했다. 20대에는 멋졌던 일이 30대에는 안타까운 일이 될 수가 있다. 남들이 점점 자리 잡아가는 모습을 볼 때 아직 시작조차 못한 나를 보며 매번 어떻게 인생이 이렇게 안 풀릴 수 있지를 감탄하는 중이다. 남들 차 있고 집 있을 나이, 하나하나 없던 것이 늘어가는데 나는 있던 것 마저 잃어간다. 20살에 차가 없어 무더운 여름에 온갖 짐을 무겁게 지고 땀을 뻘뻘 흘리고 걸어가는 건 청춘이었는데 지금 그러니 힘든 몸은 더 힘들어지고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가 아파 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보았다. 한 번에 먹어야 할 약이 10알 가까이 되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바빠서 까먹고 거의 못 먹는 게 다반사다. 하루에 한 번 끼니를 챙기면 잘 챙기는 거니 약도 거의 하루에 한 번 정도만 제대로 먹을 수 있었다. 몸은 정신을 지배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기운이 나도 잠깐 반짝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그냥 다 놓자.. 그동안 모은 쌈짓돈이 이젠 더 이상 아까워 보이지 않았다. 브레이크를 세워놓고 페달을 밟는 자전거처럼 아무리 밟아도 이제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노력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다보면 불가능과 가능사이에서 큰 딜레마에 빠진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은 더이상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을 내 힘을도 바꾸려고 할 때 스스로가 힘들어진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돈이 없다는 이유로 야금야금 가져간 돈들을 돌려주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그 돈은 포기하고 내가 버는 게 빠르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결국 내가 지치니 이제는 더 이상 그 돈을 내가 벌어서 다시 채울 용기가 없었다. 돈과 성공에 대한 생각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다. 타고난 운명을 거스르려는 생각은 치기 어렸다. 타고난 운명은 거스르려 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타고 가는 거였다. 무엇이든 거스르려 하면 더 큰 마찰이 생기고 더 큰 고통이 온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인생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내가 노력해도 어차피 인생은 될 대로 된다. 그러니 그 인생를 거스르려고 모든 걸 포기해 가며 맞지 않는 노력을 하는 것보다는 그냥 될 대로 되라지라는 식으로 실제 살아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