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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녕? 메니에르

메니에르를 처음 만나게 되던 날

by 경주



여느 날과 다름없이 눈을 뜨면 진로상담 강의를 튼다. 귀는 최대한 강의 소리에 집중하고 몸은 바삐 움직인다. 새벽 5시, 정리하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 어제의 나를 탓하며 거실에 널브러진 옷가지와 책, 그리고 쓰레기를 주워 담는다. 수북하게 쌓인 설거지거리로 주방은 북적댄다.


그 수많은 일거리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어떻게 이런 상태로 내버려 둘 수 있어?!




설거지가 빠져나간 싱크대는 이제야 쌀을 씻을 공간을 내어준다. 밥을 올리고 버튼을 누르면 29분 후 밥이 완성된다는 메시지가 뜬다. 지금부터 29분 후까지 반찬과 국을 완성해야 한다. 귀는 최대한 강의에 집중한다.






새벽 6시가 되면 드디어 책상에 앉을 수 있다. 그날 가르쳐야 할 부분을 다시 읽어본다. 시작과 전개 그리고 마무리를 고민하며 매 차시 계획된 만큼의 진도를 나가야 시험 범위를 급하지 않게 끝낼 수 있다.


중학교 1학년 수업은 아이들과 즐거운 활동 중심의 수업이어서 참여를 끌어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3학년 수업은 대체로 나 혼자의 강의식이어서 함께하는 재미가 확실히 덜하다. 오로지 지적으로 아이들의 흥미를 자극해야 해서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이들의 지적인 흥미를 자극할 학습 요소를 찾아보자. 수업 준비를 충분히 즐기며 일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좋겠다. 충분히 일할 여유를 갖고 싶다.






일할 여유라니 이보다 우스운 말이 있는가.




이런 7시가 지나버렸다. 7시 20분! 7시부터는 아이들을 깨우고 학교 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는데 이런! 시간이 촉박하다.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연년생의 딸과 아들은 아직도 한밤중이다. 딸은 깨워도 요지부동, 아들은 깨우면 벼락같은 소리를 낸다. 내가 직장맘이 아니었다면 굳이 7시에 아이들을 깨워야 하지 않을 텐데 미안한 마음이 앞서 아이들에게 화를 낼 수 없다.


달래고 달래다 보면 7시 40분에 아이들은 일어난다. 밥과 국을 뜨고 보니 50분! 차린 밥을 입에 떠 먹여준다. 내가 있을 때 한 숟갈이라도 더 먹는 모습을 보고 싶다. 딸도 아들도 한 숟갈씩 입에 넣어주다 보면 벌써 8시가 된다.



떠 놓은 밥은 꼭 다 먹어!


마지막 유언이라도 남기듯 애틋하게 집을 나선다.







이런 배가 고프다. 또 공복으로 집을 나선 것이다. 서둘러 차를 달려본다. 문자가 온다. 코로나로 인해 출결에 대해 묻는다. 신호 대기에 짬을 내어 문자에 답을 한다. 출발한 지 10분이면 학교에 도착이다.


주차하고 내려서 학교 건물까지 걷는다. 걷고 싶다. 아침 시간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걷고 싶다.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조금만 더 오래 맡고 싶다. 8시 15분 교무실 내 책상에 앉는다. 어제 못한 일이 산적해있다.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정리해보려는데 다시 코로나로 인한 출결 관련 문의 전화가 온다. 출결 서류는 교사인 내가 보아도 복잡하다. 체계화시킨다는 것이 간소화시킨다는 것이 여전히 수많은 물음을 던지게 한다.


8시 45분 교실로 향한다. 3월을 보내면 1학기가 지난 것 같다는 말을 할 정도로 3월의 학교는 교사에게 정신없이 지나는 무척 바쁜 시간이다.





학생과에서 교무부에서 학생들에게 알려주라고 한 내용을 메모하여 교실로 향한다. 3학년 2반 올해 우리반 아이들은 참 착하다. 더 많이 주고 싶고 더 잘해주고 싶다. 이 아이들의 인생에 작은 획을 그어주고 싶다. 아이들에게 전달 사항을 알리려는데 이상하다.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왼쪽 귀에서는 공사장에서 들릴 법한 어마어마한 큰 소리의 붕~ 소리가 들린다. 바닥에 주저앉고 싶다. 너무 힘들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아이들 앞에서 주저앉으면 기절을 한다면 아이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줄 것이다. 참아보자.


아이들은 모두 조용하다. 보건실로 가셔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난 지금 보건실로 향할 수가 없다. 한 걸음만 떼도 쓰러질 것 같다. 8시 50분부터 시작된 어지럼증이 9시 15분 조례를 마치는 종이 울려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조금은 나아졌다. 벽을 잡고 걸어본다. 보건실에 도착하여 물을 한 잔 마시며 쉬었다가 교무실로 향했다.





다행히 1교시가 없어 공강이었다. 쉬고 싶었지만 다시 일을 잡아본다. 1분 1초라도 쉰다면 그만큼 일이 늦어진다면 퇴근이 늦어지거나 주말에 일을 해야 한다. 나의 아이들과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내려면 착한 우리 반 아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주려면 나는 쉬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마치 물속에 빠진 냥 뭔가 명확하지 않은 느낌이다. 아가씨 때에는 일이 참 빨랐는데 마흔 중반이 된 지금은 일이 더디다. 일이 늦은 아줌마 선생님을 보며 어떻게 일이 저렇게 느릴 수 있나 궁금했는데 나 역시 이렇게 일이 늦어질 수 있구나 싶다. 휴직의 선물인지 나이의 힘인지 알 수 없다.


2교시 수업에 들어간다. 이상하다. 말을 하는 내 목소리가 내 안에서 울린다. 내가 말을 할 때마다 내 몸은 울림통이 되어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을 메아리쳐 흐르게 한다.




퇴근 시간이다. 귀에서 들린 소리의 원인은 주말에 듣기로 하자. 퇴근 후 병원에 다녀오면 학교 일도 아이들 저녁도 어느 것도 할 수가 없다. 오늘은 남아서 출결을 정리해보자. 코로나로 인한 출결 사항은 너무 복잡하고 많다.


3월 중순 벌써 50건이 넘는다. 누락되는 것이 없도록 중간에 한번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 아이들에게 전화를 건다. 집에 있는 컵밥 데워 먹으라고 하자 아이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일을 정리하다 보니 저녁 8시가 넘는다.


이제는 집에 가야 한다. 아이들이 내가 없으면 잠을 자지 않으니까. 집에 돌아오니 아침에 차려준 밥은 내가 먹인 상태 그대로다. 더 이상은 숟가락도 대지 않았음이 느껴진다. 아들은 배가 고팠는지 컵밥 2개를 데워 먹었고 딸은 입맛에 맞지 않는지 컵밥 하나를 데워놓고 3분의 1도 먹지 않았다.


식탁 위는 아이들의 하루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오늘 딸이 먹은 음식의 총량은 저 컵밥 하나도 되지 않을 것이 뻔하다. 식탁을 정리하며 서러움이 밀려온다. 내 밥도 내 아이의 밥도 챙기지 못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토요일 아침 대학병원 이비인후과를 찾는다. 어지럼증을 느낀 시간, 빈도, 귀에서 들린 소리 등의 증상을 물으신다. 청력 검사를 하자고 하신다. 잘 들리는데 왜 청력 검사를 하자고 하실까 궁금하다.


검사를 마치고 다시 의사 선생님을 만난다. 물에 빠진 듯한 느낌은 이충만감, 귀에서 들린 큰 소리는 이명, 뱅뱅 도는 어지럼, 그리고 청력 검사 결과 나온 왼쪽 귀의 청력 저하 증상을 미루어 볼 때 메니에르가 의심된다고 하신다.


메니에르? 처음 들어보는 병이다. 주말에는 할 수 없는 다양한 검사를 더 해야 하니 평일에 다시 내원하라고 하신다. 남편에게 전화가 온다.




귀 멀쩡하다고 하지?


남편의 저 말투가 난 참 서럽다.






왼쪽 귀의 청력이 많이 떨어졌대.

귀에서 소리가 들린 건 이명이고
물속에 빠진 느낌은 이충만감이라고 한대.

20분 이상 지속된 어지럼과 함께 동반된 청력 저하, 이명, 이충만감으로 보아
메니에르가 의심된다고.

더 정확한 것은 다음 주에
정밀 검사해보자고 하셨어.




남편은 아무 말이 없다.

나는 남편에게 서러움을 토로할 기운도 없다.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눕는다. 나는 정말 병이 난 걸까? 왼쪽 귀에 큰 소라를 댄 듯 바닷소리가 들린다. 좋아하는 바다를 본 지 꽤 되었네. 엉뚱한 생각을 한다.


반대쪽 귀에서는 삐 소리가 난다. 이런 소리는 이미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들렸는데 이미 그때부터였나 보다며 혼자 생각해본다. 물론 이토록 어지럽고 큰 이명은 처음이다.




조금씩 들려오는 내 몸의 소리를
난 왜 들으려 하지 않았던 걸까?




새벽 5시에 일어나도 아침 식사를 할 시간조차 없고 출근 시간 20분 전 학교에 도착해도 차 한잔 마실 여유가 없었으며 아파도 병원에 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책임감, 인내, 성실, 겸손함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미덕이었다. 나는 그걸 지켜내느라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쓰곤 했다. 어쩌면 그 이상을 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온 나여서, 내가 만난 건 메니에르였다.



안녕? 메니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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