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봉황동 유적
가야는 유구한 역사를 가졌음에도 학교에서는 거의 배우지 않는다. 시수가 많아야 1차시 정도로 짧다. 조선왕조 500년보다 더 긴 역사를 너무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안타깝기만 하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가 합쳐져 확대 지정된 곳이다. 이곳은 고인돌, 조개무지, 항구 시설, 봉황 토성 등이 발굴되어 청동기 시대부터 가야 시대까지의 복합 유적의 성격을 지닌다. 또한 가야인의 생활상과 더불어 가야 왕권의 존재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회현리 패총은 조개껍데기 등이 쌓여 만든 조개무지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각종 철기 및 골각기 토기와 탄화미 등은 가야시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이곳에서 발견된 중국 화폐 화천은 당시의 국제 교역 상황을 잘 보여준다.
봉황대는 조선시대 김해 부사를 지낸 정현석이 '언덕의 모양이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과 같다'하여 대를 쌓고 봉황대라 부른 것에서 유래하였다. 구릉 주변에서는 가야 시대의 다양한 생활유적 및 유물들이 발견되었으며 구릉 위에는 황세 장군과 여의낭자가 어린 시절 함께 지냈다고 전해지는 황세바위 등이 위치하고 있다. 봉황대 서쪽에서는 가야시대 토성과 대규모 창고형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옛 봉황초등학교 남쪽에서는 가야시대의 배가 발견되어 당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던 가야의 해상 왕국으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2003년 왕궁 추정지 동쪽에서 봉황토성의 일부가 확인되었으며 2015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왕궁 추정지 발굴 조사에서는 4세기의 대형 건물터와 화로 모양 그릇 받침, 원통 모양 토기, 굽다리 접시, 유리구슬, 굽은 옥 등 가야 왕릉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2019년에는 왕궁 추정지 인근에서 대형 적심 건물터가 발견되었는데 약 20미터 높이의 왕궁 관련 시설로 추정되어 가야 왕궁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봉황동 유적은 1907년 8월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에 의해 발굴되었다. 초기 발굴은 1907년, 1914년, 1915년, 1917년, 1920년, 1922년, 1934년, 1935년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여덟 차례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들이 사용했던 방법은 계단식 조사 방법이다. 당시에는 획기적인 인공층위 설정에 의한 현대적인 기법의 고고학적 조사라는 점에서 학문적 의의가 크다. 이 방법은 일단 층위를 중시하는 근본 취지에서 출발하여 좁은 지역을 샘플로 선정, 계단식으로 발굴함으로써 짧은 시간 안에 전체적인 유적의 성격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강제로 설정된 인공 층위를 통해 획일적으로 위쪽은 후대, 아래쪽은 선대의 것으로 적용하여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자연층위의 특수성을 전혀 감안하지 않는 모순을 안고 있다. 따라서 계단식 발굴에 의한 층위 구분은 실질적으로 발굴하기 어렵다. 패총의 퇴적에 따른 당시 사람들의 폐기, 그 이후의 지형 특징, 비, 바람 등 자연여건에 따른 영향, 후대인들이 땅을 활용하기 위해 행한 훼손과 교란 등 일련의 연쇄과정의 이해를 바탕으로 패총의 층위와 시간적인 연관관계에 관해 논해야 할 것이다.
봉황동 유적 패총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봉황동 구릉의 동남단에 위치한다. 봉황대 구릉 상부에 위치한 패총은 비교적 정연핫 층위 태세를 보이지만 이 부분의 패총은 여러 시기의 문화층이 뒤섞여 있다. 아마도 비, 바람 등의 자연적 여건과 골짜기로 연결된 급경사면에 위치한 지형적 조건 때문에 반복적으로 층위가 뒤집힌 현상이 생긴 것 같다. 출토 유물을 통해 살펴볼 때 대체로 기원전후한 시기부터 4세기 대에 걸쳐 형성된 패총이지만 이러한 여건상 하나의 층위에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뒤섞여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패총에서는 당시 생활 및 문화활동에 사용했던 토기, 골각패제품(골촉, 침, 소형칼자루 등), 국제교류와 관련한 중국계 유물( 화천, 청동경), 일본계 유물(야요이 토기, 하지키) 등 다양한 인공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또한 식생활과 관련한 탄화미, 동물 뼈(상어, 돔, 고래, 기러기, 오리, 꿩, 닭, 사슴, 노루, 개, 소, 말 등), 패각(굴, 꼬막, 담치, 홍합, 고동, 소라, 백하, 다슬기 등) 다양한 자연 유물도 같이 출토되어 당니 생활풍습과 자연환경 등의 해명에 중요한 근거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김해 봉황동 유적 황세바위 이야기.
황세는 가락국의 9대 임금(숙왕) 때의 인물로 황정승의 아들이다. 황정승과 친구인 출정승은 각기 아들을 낳으면 의형제를, 아들과 딸을 낳으면 서로 결혼시키기로 하였으나 황정승의 집안이 몰락하자 출정승은 딸인 여의를 아들이라 거짓말했다.
의형제를 맺은 황세와 여의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는데 어느 날 황세가 여의에게 오줌 멀리 누기 시합을 제안했는데 여의는 삼대줄기를 사용해 위기를 넘겼으니 이 시합을 한 곳이 바로 황세바위다.
여의가 자라면서 점점 여인의 모습을 띠게 되자 이를 수상히 여긴 황세가 거북내(해반천)에서 멱을 감자고 하였는데 여의가 할 수 없이 여자임을 밝히고 둘은 결혼을 약속했다. 그 후 신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황세가 왕의 명을 받아 유민공주와 결혼하게 되자 여의 낭자는 황세장군을 그리워하다 죽었다. 황세 또한 여의 낭자를 그리워하다 병을 얻어 그해 여의 낭자를 따라 죽었으며, 여의 낭자는 유민산(임호산)으로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남아 있다.
현재 봉황동 유적 구릉 정상부에 여의 낭자를 모신 여의각과 두 사람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황세바위 등이 자리하고 있다.
봉황대 근처에 복원된 고상가옥과 주거는 봉황동 유적에서 발굴 조사된 가야시대 건물지 등을 참고로 하여 2002년 봉황동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한 것이다. 가야시대의 일반적인 주거 형태는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인데 여기에 복원된 수혈주거지는 봉황대 진입 소방도로 내 유적 46호 주거지를 참고하여 추정 복원한 것이다.
고상가옥은 가야시대의 보편적인 주거 형태인 수혈주거와 달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로서 주로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한 특수 용도의 건축물이 많다. 즉, 고상가옥은 난방시설이 용이하지 않아 일반 주거용 건물로는 부적합 하지만 지면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만들어져 짐승과 습기, 침수 등으로부터 병해, 방제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창고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수로 왕릉 근처 왕궁 추적지로 유물 발굴 현장이다. 가야 유적지를 둘러보기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다. 봉황대 아래 주차를 하면 김수로왕릉과 인근 김해 고분박물관과 국립 김해박물관까지 걸어서 체험할 수 있는 거리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에도 선정된 고분박물관 길은 언제 걸어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곳 봉황대 아래 잔디밭엔 봄이면 그야말로 환상이다.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연상케 하는 봄의 향연이 펼쳐진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들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편안한 모습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펼쳐진다.
이곳 봉황대도 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