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리즐리 맨'
삶의 이유는, 때론 죽음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죽을 만큼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생활을 송두리째 흔들 정도로 커다란 열정은 과연 좋기만 한 일일까. 예전에는 좋아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일이라 생각했었다. 좋아하는 일은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일이라 믿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좋아하는 일만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과연 행복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람들은 죽을 만큼 좋아한다는 말을 쉽게 쉽게 내뱉는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죽게 될 것이라는 가정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렇기에 행복의 끝은 또 다른 행복이 아닌, 불행일 것이라 생각한다. 죽을 만큼 좋아하는 일은, 그 일 때문에 내 생활이 흔들릴 수 있다는 말이다. 행복은 결국 끝이 있는 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행복이라는 소재 자체는 누구에게나 개인적인 고민이고, 저마다의 몫이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13년간 곰과 함께 생활했던 사람의 행적을 좇아가는 영화다. 불의의 사고로 곰에게 잡아먹힌, 곰을 좋아했던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되어버린 것인지 찾아간다. 티모시 트레드웰은 여자 친구와 함께 곰 서식지에서 생활했다. 가감 없이 곰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티모시의 모습과, 죽음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의 인터뷰는 교차되면서 '티모시 트레드웰'이라는 사람을 채워간다. 곰이 되고 싶어 했던 사람은 TV를 통해서 '유명인'으로 규정되었고, '괴짜'로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팔렸다.
열정적인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은 다양하다. 사람들은 열정의 깊이를 재보거나, 열정의 넓이를 가늠한다. 그 사람의 온도를 알기 위해서는 직접 부대껴봐야 한다. 개중에는 데일만큼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도 있고, 그 어떤 일에도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열정의 종류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오히려 단순하다. 하지만, 열정의 크기가 다름을 인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떻게든 열정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열정을, 자연을 향해 열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의 첫인상은 그저 무작정 본인의 열정을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곰을 비롯해서 야생 동물들을 대하는 태도에는 존중과 두려움이 함께 있었다. 그는 동물을 상대로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다가갔고, 행동했다. 티모시 트레드웰은 본인이 좋아한다 해서, 함부로 무언가를 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의 생활 방식을 이해하고, 영역을 존중했다. 그는 본인이 위안을 받았던 대자연을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통제되지 않은 대자연의 냉혹함을 두려워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생긴다는 것은 이해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다. 나는 좋아할 이유가 있어야 좋아하게 된다고 생각을 했었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계기가 뚜렷하게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그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내 취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생각해내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에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취미만 만들어두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좋아할 이유를 만들어내면서, 정작 진짜 좋아했던 것에서는 멀어져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이 영화는 '좋아하는 일'에 얽힌 수없이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작업이었다. 순수하게 무언가에 미쳐있던 사람에 대해서 그의 주변 사람들과 죽기 전의 궤적을 따라 걷는 일이었다. 단지 취미를 묻고 끝나는 것이 아닌, '취미' 자체가 생존의 이유가 되어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려워해서, 곰들의 성역으로 내쫓기듯 도망쳐간 그는 대자연과의 소통을 통해서 다시금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에 용기를 내었다. 본인이 그랬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곰과 야생동물에 관심을 주기를 바랐을 수도 있고 환경 보호에 더 열을 올렸을 수도 있다. 다만, 그 일이 항상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못해서 그는 괴로워했다. 환경을 생각하는 척하는 위선자라는 비난들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곰과의 생활을 소개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또다시 관계를 단절시킬지도 모르는 비난 때문에 그는 혼란스러워했다. 그 때문에, 다큐멘터리 속의 이 남자는 너무나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인물처럼 보였던 것 같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있는 극단적인 상황에 익숙해지기에는 13년이라는 세월은 아직 짧았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그리즐리 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