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르는 동안에는 변할 수 없다
Q : 작년에 산 호접란이 꽤 오래 꽃망울을 매달고 있었는데, 꽃이 다 떨어지고 꽃대가 노랗게 변해서 잘라줬어요. 그런데 올해는 기다려도 꽃이 안 피네요. 뭐가 문제일까요?
A : 혹시 식물이 계속 따뜻한 실내에만 머무르지는 않았을까요? 꽃을 피우는 식물들의 경우, 특정한 온도나 빛 조건을 채워주어야 꽃을 피우기도 해요. 조금씩 위치를 옮겨가며 서서히 온도를 낮춘 뒤, 낮은 온도를 한번 겪게 해준 뒤 다시 따뜻한 곳으로 서서히 옮겨주세요. 갑작스러운 온도변화를 피해, 천천히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면 꽃을 틔울 수 있게 될 거예요.
식물은 본래 한 장소에 뿌리를 박고 잘 살아가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계절과 날씨의 온도를 겪을 수 있는 바깥 식물들의 이야기다. 실내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이 가장 많이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머무름'이다. 실내는 통풍이 잘 되지 않고, 온도가 거의 일정하며. 빛이 불균형하다. 이렇게 침체된 환경에 오래 있는 식물은 생리 장해로 인해 갈색 반점이 생기거나 잎이 노랗게 변하고, 해충이 잘 생기며, 심하면 시들기도 한다. 당연히 느껴야 할 계절의 흐름을 느끼지 못해,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는 사이클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실내공간은 굉장히 안전한 공간이다. 들이치는 비바람도,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잎을 태워 버릴 따가운 직사광선도 없다. 거의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고, 밝은 빛을 쐴 수 있고, 때 되면 물을 마실 수 있는 이 공간은 식물에게 있어 이상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가 보기에 그럴 뿐이다. 통풍이 되지 않는 실내는 식물들 사이의 습도를 높여 곰팡이병이나 해충이 잘 생기게 하고, 언뜻 보기에 충분히 밝아 보이는 실내등은 식물이 광합성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빛이다. (조도를 재는 어플 등으로 실내 등과 창문을 통한 빛을 비교해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가드너가 꾸준한 관심을 쏟아주지 않는다면, 화분 속의 영양분을 다 써버려 영양부족으로 말라죽기도 한다.
식물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계속 환경을 살펴야 한다. 빛이 더 잘 들어야 더 건강하게 자라는 건 아닌지, 혹은 지금 빛이 너무 강한 환경은 아닌지, 한쪽에만 강한 빛을 받아 식물의 잎 일부만 타거나 줄기가 휘고 있지는 않은지, 심하게 건조하거나 습하지는 않은지, 너무 덥거나 추운 곳에 있지는 않은지.
계속 확인하고 옮겨주고, 변화를 겪게 해주어야 한다. 실내공간에서 쉽게 경험하기 힘든 계절의 변화를, 환경의 변화를 겪게 해줌으로서 보완해야 한다.
사시사철 무더운 지방에서 온 열대식물의 경우에도 변화는 중요하다. 열대식물의 경우에는 특히나 바람이 중요한데, 통풍이 잘 되지 않는 장소에서 식물을 키울 경우에는 금방 응애, 총채, 온실가루이, 깍지벌레 등의 해충이 창궐해버린다. 바람을 쐬어주고, 물샤워를 시켜주고, 가끔 과하지 않은 온습도차를 경험하게 해 주어야 이런 해충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
나는 변화를 제법 싫어하는 사람이다. 루틴이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고,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동안 새로운 무언가를 도전하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않고, 평온하고 안전한 장소에서 스스로를 고립시켜 왔다. 쭉 그렇게 살아왔으면 또 나름대로의 결말을 맞이했겠지만, 삶이란 늘 변수가 생긴다.
우연히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울며 겨자 먹기였다. 처음 가보는 장소, 나와 다른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 처음 경험하는 일들.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다. 수많은 실패도 겪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경험들, 실패를 포함한 경험들은 안 겪는 것보다 경험하는 것이 훨씬 더 나았다.
내 관점을 넓히고, 시야를 밝히고, 세계를 확장시켜 주는 경험들이었다.
가기 싫어 발을 질질 끌며 어거지로 기어간 장소는 흥미로웠고,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재수없어 했을,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는 인상적이었고, 머리에 총을 맞지 않는 이상 해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은 재미있었다.
계속 머무르기만 했다면 평생 모를 일이었다. 가끔 바깥 바람을 쐬어주는 식물이 더 건강하게 자라는 것처럼, 다른 세계의 외풍을 맞아가며 흔들린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더 튼튼해졌다. 아직 움트고 있을 뿐인 꽃봉오리지만, 건강하고 커다란 꽃을 피워낼 수 있도록, 뿌리부터 탄탄하게 자라나고 있다.
당신이 지금 무언가를 고민하고, 매너리즘을 느끼고 있다면, 우선 지금 있는 곳에서 잠시 벗어나 보기를 권한다. 안 가본 장소에 가고, 하지 않을 경험을 하고,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해보니까 별로였어'는 '아직 해보지 않았어' 보다는 훨씬 더 낫다. 그 모든 경험들이, 당신의 뿌리를 더 튼튼하게 만들고, 언젠가 꽃을 피워낼 수 있는 변화를 줄 것이다.
오늘의 식물 용어 알아보기
생리장해 : 공기,온도,영양 등이 적절하지 못한 환경 조건에서 식물 자체의 생리적 이상으로 야기되는 모든 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