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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초이 Jan 27. 2024

모두가 패자였다

멜버른 day 8

8월 3일 수요일


단데농 국립공원Dandenong Ranges National Park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창밖으로 보이는 시골풍경이 도심에서 느끼지 못했던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너무 여유를 부렸던 것일까. 원래 목표로 했던 퍼핑빌리 열차를 타지 못하게 됐다.

나의 착각으로 다른 역에 내린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는 어퍼 펀트리 걸리Upper Ferntree Gully 역에서부터 트래킹 코스를 걷기 시작했다.

숲길을 내딛을 때마다 머리가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누아가 캥거루와 비슷한 동물을 발견하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 동물은 누아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도 누아의 뒤꽁무니를 쫓아갔다.

그 동물은 우리와 오랫동안 눈을 맞췄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동물의 생각도 궁금했지만 누아의 생각도 궁금했다.

나는 누아에게 전날 미키와 오갔던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녀가 궁금해하는 눈치를 느꼈지만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그만 가자. 나는 그녀를 재촉했다.

우리는 1000 steps라는 고지로 향했다.

숲길을 계속 걸었다.

숨이 차서 대화할 여유도 없었다. 

결국 고지까지 가지 못하고 돌아섰다. 잘 풀리지 않는 날도 있는 거지, 하고 위안 삼았다.

기차를 타고 다시 시내로 향했다. 

세인트 킬다St Kilda 역에 내려서 전쟁 기념관Shrine of Remembrance에 들렀다. 

승리의 흔적보다는 비통한 상처가 느껴지는 큐레이션이었다. 모두가 패자였다.

시간, 거리, 트라우마, 죽음은 연인을 갈라놓는다, 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계단과 통로들은 대체로 어두웠고 전쟁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옥상에 올라가자 멜버른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전쟁이 끝난 세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기념관 옆에 있는 로얄 식물원Royal Botanic Gardens Victoria에 가려고 했지만 임시로 문이 닫혀있었다.

실망에 빠진 나를 누아가 위로했다.

트램을 타고 수요일에 열리는 빅토리아 나잇 마켓에 다시 갔다.

멜버른에 도착하던 날 갔으니 벌써 일주일이 지난 것이다.

그때만큼의 감흥은 없어서 휙 둘러보고 나왔다.

우연히 라면집을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들어갔다.

만두가 들어있는 라면을 주문했는데 내가 싫어하는 죽순이 들어있었다. 실망이 더해졌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와서 혼자 라운지에 올라갔다. 

창밖을 내다보자 멜버른의 야경이 펼쳐졌다.

내일이 지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심경이 복잡했다.

스피커에서 마룬5의 페이폰이 흘러나왔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하는 심정으로 노래를 감상했다.

난 이제 잔돈을 다 써버렸고

우리의 시간들은 다 가버렸어. 다 잘못된 거야.

우리 둘의 계획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기억하기 힘들겠지.

우리가 함께 했던 것들.

더 상상하기 어려운 건 너가 내 곁에 없다는 거야.

휴대폰으로 가사를 찾아보다가 누아는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방으로 돌아갔다.

누아 곁에 앉아 넷플릭스를 봤다. 

호주에서 시청률 1위 드라마래.

누아가 말했지만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의 내 모습은 혼이 나가있는 사람 같았다.

문득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시 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를 많이 안 썼기 때문에 다른 일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한국에 가면 시가 잘 써질까. 시는 어디서든 잘 써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우리 언제 떠나지?

내일모레. 왜?

그냥. 

그냥이 아닌 거 같은데?

미키한테 전화 왔었어. 누아가 말했다.

뭐래?

가지 말래.

그래서?

가야 한다고 했어.

더 있지 그래... 

이건 너와의 여행이잖아. 너랑 함께 마무리하고 싶어.

우리 아델레이드로 갈까? 아니면 퍼스? 내가 말했다.

아니. 이제 집에 가고 싶어.

빗줄기가 창문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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