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바람의 손길에 찰랑거리는 검은 곱슬머리. 한 여름 낮 연두색 들판 위를 뛰노는 말갈퀴처럼 살아숨쉬는 역동성으로 나에게 들어오네. 연한 살구색의 피부, 안경을 쓴채 나를 향해 웃던 그녀의 모습. 대지 위 바다를 꿈꾸며 순간의 스냅샷을 세로질러 노니는 듯한 움직임. 네 첫순간부터 마지막까지 내 카메라는 어김없이 연사모드. 그 스냅샷 하나하나 밤하늘 별처럼 나에게로 박혀간다. 네 발길 한순간 한순간씩, 메마른 대지 위일지라도, 그 위에서 푸른 초원이 돋아나는 거 같아. 네 움직임 한번은 작은 나비의 날개짓. 그러나 그 날개짓이 나에게는 거대한 나비효과. 너로인해 내 계절은 언제나 여름. 내가 있는 곳은 언제나 푸른 하늘 아래 초록 가득한 들판. 거센 야생마가 뛰노는, 드넓은 광야. 네가 없는 지금은 황량해져버린 들판. 아스팔트 도로 위에 돋아나버린, 거대한 창살과도 같은 건물들.
"익숙함에 진심을 숨기지 말자, 우리.. 우린 끝났어"
찰나의 시퀀스가 되어 내 뇌리에서 무한 반복중. 단 한번의 클릭으로 여름밤, 그 열기에 불타버린 스냅샷들. 그러나 그 숱한 시간 잿더미 속에서 유일하게 남은 기적. 오늘도 그 흔적 때문에 바람 되어 사뿐사뿐 네 톡을 스쳐지나가곤 해. 널 지나치는 내 관심이 찰나이기를 바라면서. 그저 꺼져가는 시공간처럼, 그렇게 삭제되어 버리기를 바라고 있지만, 여전히 내 드라마는 현재진행형. 결말을 혼자 부인중.
"여운에 감춰진 진심을 직시하자."
이제 가을. 곧 겨울을 앞둔 지금, 지나버린 여름을 떠올린다. 아직 나에겐 그 체온이 느껴지기에. 그 자유로움이 생각나기에. 이런 마음이 드는데, 이런 생각들 마저 전부 여운과 진심을 혼동하는 걸까.
"고마웠어.. 그동안.."
아니야. 오히려 내가 고마웠어. 널 짝사랑했던 순간은 봄. 널 사랑하는 하루하루마다 나에게는 설렘 그 자체. 그 짝사랑을 지나 너에게 닿은 시간, 여름. 너의 매력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시간. 그 시간 내내 난 너에 취해있었어. 널 좋아한 이유, 사랑하는 이유.. 삭막한 도시에서 푸른 초원을 떠올리게 해서. 지금은 죽어버린 대지 위에 퇴적한 아스팔트. 그마저도 사방팔방으로 갈라져가고 있다. 그 위에 빽빽히 솟아있는 건물들 속에서 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나이지만. 속은 텅 비어있어. 그리고 여느때처럼 돌아온 퇴근길. 창살 속에서, 아스팔트 바닥 틈으로부터 돋아난 대지의 유산이 내눈앞에 보였다. 어깨까지 내려와있는 검은 곱슬머리. 연한 살구색. 안경을 쓴 여자.
"찾았다.."
너의 등장이 빛처럼 내게 쏘아 죽어있던 추억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대기 품으로 증발하여 흩어진줄 알았던 너와 나의 시간. 네 등장으로인해 지난 순간들이 다시 내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순간, 마주한 너와 나의 눈맞춤. 그 어떠한 키스보다도 달콤한 키스. 지난 시간들을 되살리기 위한 인공호흡. 현재와 과거 사이의 갭을 메우는 키스. 그렇게 한걸음씩 그녀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녀에게 가까워질수록 시간을 회귀하는듯 푸른 여름 들판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 녹이 슬어버린 심장에서 다시 광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로소 마주한 너와나.
"오랜만이야..."
다시 여름으로 돌아왔어. 고개 숙인채 떨고있는 작은 양을 바라본다. 아직 양이지만, 곧 말갈퀴를 뽐내며 뛰놀 완전체로 돌아올거라 믿으며. 너는 밤하늘에 떠있는 별보다 대지를 뛰노는 야생을 꿈꾸는 사람이니까. 대지 위 펼쳐져있는 바닷 눈물에 젖어있던 시간에서도 꿋꿋하게 그 빗줄기 한마디마다 음표삼아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던 너였으니까. 다만, 그때처럼 여름밤의 열기가 그녀를 덮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동안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 많이.."
너로 인해 이 도시 속에서 자연을 느낄수 있어. 돌고돌아 다시 불어온 여름 바람. 다시는 놓치지 않을거야. 그렇게 그녀와 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