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퇴근 안해? 벌써 9시야~~ 집에가서 해! 집에가서~ 집에서도 다 끝날지 모르겠지만.."
고요한 사무실 안. 한때 북적였던 사람들이 썰물 밀려나가듯이 빠져나가있었고. 오로지 하나만이 홀로 남아있었다.
"가야죠~~ 먼저 가세요~ "
컴퓨터 화면 앞에 보이는, 안경에 검은 곱슬머리. 눈은 부릅 떠있는 앤이 보인다. 그 눈동자에 조금의 떨림도 없다. 그런 앤을 보며.
"앤! 연애 좀 해! 곧 사장까지 승진하는거 아냐~~ 그러게, 내가 남소 해준다니까~"
앤은 웃으며.
"괜찮아요. 생각 없어요~"
그리고 다시 열중하는 앤. 그런 앤의 뒷모습을 보며.
"저 한결같은 똥고집! 일편단심이야~~ 증말! 암튼 담주에 보자~~"
눈은 컴퓨터 화면에 고정한채.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앤.
"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실을 가득 울리는 키보드 자판 소리. 동시에 들리는 시곗 바늘 소리. 내내 앤의 자세에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일정하다. 그때, 울리는 스마트폰 알림음. 앤이 그 알림음을 보면. 액정화면에 떠있는 메시지. 성훈씨다.
'민지씨~ 오늘 생일인데, 아직까지 야근이에요?ㅠㅠ 저녁은 먹었어요? 또 거르시는 건 아니죠?ㅠㅠ"
앤은 바로 폰을 외면한채, 업무에 열중한다. 그러다가.
"저녁.. 안먹었는데.."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다가 컴퓨터를 끈뒤, 자리에서 일어나는 앤. 회사 건물을 나오니 마주하고있는 상가건물들과 드리운 밤하늘. 그리고 적막함만이 흐른다. 그 사이사이 찾는듯 보이는 앤, 무표정으로.
"혹시나 했는데.. 안왔네.."
그리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하는 앤. 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걸으며. 옆에 멀리 보이는 고층 빌딩들. 아래에는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 앤은 이어폰을 낀채 야경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어폰 너머 음성이 들려온다. 매일 퇴근길에 겪는 듯한 사건의 지평선. 시간의 경계 속에 갇혀, 나 혼자 과거 속에서 사는 거 같다.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과 사람들. 사람들은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며 잠자리에 드는데. 나 혼자만, 어제의 태양을 그리며 잠자리에 드는거 같아.. 내일이 오는게 싫어. 조금이라도 어제, 그 시간으로부터 멀어져가는게 싫어.
그때 내 귓가에서 들리는 노래. 백지영의 "한참 지나서"다.
한참지나서 나 지금 여기 왔어
그때가 그리워서 모른채 살아도 생각나더라
...
함께 보낸 시간들 추억들도
별처럼 쏟아지는데 눈물이나
여기서 널 기다리면 볼수 있을까그땐 말해줄수 있을까 이런 내 마음을
개나리교 옆, 공원 길에 있는 벤치. 그 벤치를 바라본다. 이제는, 꺼져버렸던 그때의 추억이 찰나의 촛불에 순간 밝아와 내 마음으로 쏟아져. 온 세상 가득히 빛을 내려 내 마음을 짓눌러.
"우리 앤~~~ 생일 축하해~~"
웃고 있는 재성의 모습이 보인다. 밤하늘 아래 벤치에 앉아있는 민지 앞에 생일 케익을 든채 웃고 있는 재성의 모습. 그 모습을 보고 눈을 커다랗게 뜨는 민지의 얼굴이 케익 위에 꽂혀있는 촛불에 비춰져 환하게 보인다. 그리고 동시에 눈물을 흘린다. 그런 민지의 눈물을 닦아주는 재성.
"아니, 왜 눈물을 흘리고 그래~~ 생일인데~~ 혼난다? "
훌쩍이는 민지는 퉁명스럽게.
"행복하니까 그렇지~ "
그러다가 재성을 보며.
"그런데, 진짜 혼내줄거야?"
재성은 그런 민지를 보며, 씨익 웃으며 민지에게로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면 자연스레 눈을 감는 민지.
"생일 축하해~~ 이 세상에 태어나줘서 고마워~ 사랑해~"
이윽고 순간의 촛불은 꺼지고. 재성의 마지막 말은 메아리가 되어 마음 안에서 파동을 일으키면서 울려 퍼져가고. 나는 내내 그 파동을 억누를수 밖에 없었다. 순간의 방심에 쏟아낼거 같았던 나날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늘만큼은..
"오늘은.. 안 참을래.. 내 생일이잖아.. "
네가 맞았어.. 지금 잠깐 아프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거라는 거. 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너에 대한 마음은 짙어져만가.. 통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보고싶어.. "
진공의 세계 속에 갇힌채, 소리없는 흐느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순간, 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있었고. 그렇게 그날 밤 내내 계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