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하늘에서 어둠을 느낀다는 일이란.. 잿빛 하늘을 느낀다는 일이란.. 태양이 내리쬐이는 어느 오후 날이 회색 짙은 구름들로 가득 채워진 날처럼 느껴지는 일이란.. 결코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의욕이 없다. 고무처럼 팽팽했던 마음이 뜨거운 시간의 열에 축 늘어져 녹아내려지는 느낌이 든다. 시간이, 공간이, 내 모든 것이 녹아 없어지는 것만 같다. 이 세상에서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기 싫다. 이 밤이 영원한 것만 같고. 내일 아침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패배감과 무력감. 지금 이곳을 가득 메우는 아우라. 그 아우라에 매순간 압도되어가는 듯하다.
“재성씨~~ 토요일 6시에 올림픽 공원에서 만나요~”
단비 씨가 어느 날 오후에 내게 말했었다. 곱슬머리를 한 단비 씨의 모습에 멍하니 바라봤던 나. 그런 나에게 단비 씨가 어느 날 갑자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도 여름 속에 머물러 있던 나. 그러나, 그동안 가을, 겨울이 불어오고 있었고. 그 겨울이 지나, 봄. 그 봄을 지나 여름으로 다시. 여느 여름처럼, 그때 그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음을 느꼈던 순간, 그 순간에 단비 씨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바라보았다. 내 눈맞춤은 계속 되고 있었고. 내 눈맞춤에 그녀는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용기내는 거에요, 재성씨!! 많이 고민했어요.. 얘기할까 말까... 그런데, 못참겠더라구요.. 말 안하면 후회할 거 같은 거에요.. 평생이요..”
순간, 내 귓가에 스치는 음성..
“말 안하면 후회할 거 같아.. 평생..”
울고 있는 민지에게 말하는 나.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너는.. 그게 가능해? 우리의 시간.. 추억... 함께 했던 그 모든 순간들.. 어느날 갑자기 셔터 내려듯이 내릴 수 있어? 살수 있을까.. 널 붙잡고 싶어.. 지금 이순간에도 보고 싶어.. 널 사랑해.. 사랑해.. 이 말 안하면.. 평생 후회할 거 같아.. 널 지금 붙잡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거 같아..”
옳은 선택이었을까. 과연 그게 최선이었을까? 그때는 그러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생각은 늘 바뀌는 법이니까. 그때 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에게는 고통이 아니었을까. 네 마음을 도려내는 칼날처럼 날카롭지 않았을까. 그 칼날에 베어서 아파하지 않았을까. 그때 내 행동이 최선이었을까. 진정으로 널 위해 옳은 선택이었을까.
“재성씨.. 어때요?”
단비씨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 아래, 눈부신 햇살에 쏟아지는 빛. 그 빛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불어오고 있었다. 그 빛이 너무나 부셔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오로지 보인 건 찰랑거리는 곱슬머리와 안경 뿐이었다. 그 모습은 파동을 일으켜 긴장감을 내 온 신경으로 전파시키고 있었다. 그 전파에 미묘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를 보았다. 흔들리는 마음의 초점을 이내 고정시키려 애쓰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떨리는 음성을 애써 누른 채 물었다.
“올림픽 공원.. 이죠?”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네! 올림픽 공원이요! 같이 산책해요~ 거기 나홀로 나무가 그렇게 예쁘대요~”
돌고돌아 다시 여름. 그리고 다시 찾아온 여름밤. 그 밤에서 너와 함께 했었던 자리에 앉고 있다. 여름밤이 돌아왔다. 너와의 첫날이었던 이곳에서.. 다시.. 그때 그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아직 낮의 온기가 남아있는 밤공기.. 그 공기에 낮의 여운을 생각하면서, 곧 증발해 차갑게 변해버릴 순간을 두려워한 채.. 그렇게 지금 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름밤이 돌아왔다.. 너의 여름밤이..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