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사라진 사람들

오후의 농땡이 타임

by 흑곰아제

점심을 먹고 난 후 30분.

미쓰리의 하루에서 가장 여유로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오전에 모든 업무를 완벽하게 마무리한 덕분에 오후는 말 그대로 '농땡이' 시간이었다.


"아, 졸려."

미쓰리는 의자에 몸을 맡기며 하품을 했다.

점심 식사 후의 나른함이 온몸을 감쌌다.

김부장도 점심 후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50대 중반의 김부장에게는 점심 후 낮잠이 거의 일과나 다름없었다.

조용한 사무실에는 에어컨 소리와 창밖에서 들려오는 거리를 바삐 움직이는 차들의 경적 소리만이 들렸다.


미쓰리는 서랍에서 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오전에 집중하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립스틱을 다시 발랐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니 35살이라는 나이가 실감났다.

아직은 젊어 보이지만 눈가에 잔주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이는 못 속이지."

혼자 중얼거리며 파운데이션을 다시 발라줬다.


그러다가 문득 책상 위에 놓인 김반장 급여명세서가 눈에 들어왔다.

"아, 김반장님께 서류 전달해야 하는데."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은행에 가는 길에 현장에 들러서 전달하면 되니까.

승신은 다시 의자에 기대어 핸드폰을 꺼냈다.


오후 시간을 보내는 승신만의 루틴이 시작되었다.

인스타그램을 켜서 친구들의 일상을 구경했다.

대학 동창 미숙은 또 해외여행을 가서 예쁜 사진들을 올렸다. 이번엔 발리였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배경으로 한 미숙이의 모습이 부러웠다.


전직장 동료인 남원은 남자친구와 데이트 사진을 올렸다.

한강공원에서 치킨을 먹으며 찍은 사진이었는데, 둘이 정말 행복해 보였다.

35살 미혼인 자신과 비교되어 살짝 우울해졌다.

"에이, 뭐 어때. 나는 나대로 잘 살고 있는데."

미쓰리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위로했다.

결혼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자신도 나름대로 안정적인 직장에서 괜찮은 월급을 받으며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짜증이난 미쓰리는 유튜브로 넘어갔다.

고양이가 주인을 깨우는 영상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고양이의 애교 넘치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고양이 한 마리 키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사는 외로움도 달랠 수 있을 것 같고....


가끔 김부장이 고개를 들면 재빠르게 업무용 엑셀 프로그램으로 화면을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미 몇 년째 반복하고 있는 일이라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김부장은 다행히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건설업체 직장인 일과'라고 검색하자 비슷한 고민들이 쏟아져 나왔다.

역시 자신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다들 오후에는 뭐하고 지내지?"

댓글들을 읽어보니 오후에 할 일이 없어서 고민이라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어떤 사람은 온라인 쇼핑을 한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주식을 본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부업으로 블로그를 운영한다고 했다.

미쓰리는 자신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

'오전에 일을 몰아서 처리하는 것도 나름의 장점이 있지.'


시계를 보니 12시 40분. 아직 20분이나 더 남았다.

미쓰리는 온라인 쇼핑몰에 접속해서 옷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요즘 유행하는 원피스들을 보면서 장바구니에 담았다 뺐다를 반복했다.

35살이 되니까 너무 화려한 옷보다는 깔끔하고 단정한 스타일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이거 예쁘네."

혼자 중얼거리며 가격표를 보고 놀랐다. 15만 원짜리 블라우스였다.

미쓰리의 한 달 용돈으로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월급의 대부분은 생활비로 나가고, 적금도 넣어야 하니 옷에 쓸 수 있는 돈은 한정적이었다.

"역시 구경만 하자."

미쓰리는 아쉬워하며 창을 닫았다.

언젠가는 돈 걱정 없이 마음에 드는 옷을 살 수 있는 날이 올까?

(사실, 사이즈가 없다는 것은 미쓰리는 못 본척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김부장이 코를 골며 자는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평소에는 엄격해 보이는 김부장도 잠들면 평범한 아저씨였다.

김부장의 잠든 모습을 휴대폰으로 몰래 사진을 찍으려다가 말았다.

나중에 깨어나면 뭐라고 할지 뻔했다.

대신 재미있는 짤방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요즘 유행하는 밈들을 보면서 혼자 웃다가 김부장이 깰까 봐 입을 막기도 했다.


12시 50분이 되자 배가 좀 고파졌다.

점심을 먹었지만 양이 적었나 보다.

서랍에서 비스킷을 꺼내 먹으면서 계속 핸드폰을 보았다.

이번에는 네이버 웹툰을 보기 시작했다.

요즘 인기 있는 로맨스 웹툰이었는데, 주인공 여자가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직장인이어서 공감이 되었다.

"나도 이런 로맨스 한번 해보고 싶다."

웹툰 속 남자 주인공처럼 다정하고 든든한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35살이 되니까 만날 기회도 별로 없고, 소개팅을 해봐도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1시가 가까워오자 미쓰리는 슬슬 준비를 시작했다.

가방을 챙기고 서류들을 정리했다.

은행 업무용 서류와 김반장에게 전달할 급여명세서, 그리고 현장 안전점검 관련 문서들까지.

서류를 정리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해봤다.

실수가 있으면 안 되니까.

김반장에게 전달할 급여명세서를 보니 이번 달도 야근수당이 꽤 많이 들어가 있었다.

요즘 공사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야근이 잦아졌나 보다.

‘김반장님도 60이 넘은 나이에 힘드실 텐데.’


"미쓰리야, 은행 언제 가려고?"

1시가 넘어서야 김부장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눈이 부어있는 것을 보니 정말 깊게 잠들었나 보다.


"아, 지금 가려고요!"


미쓰리는 허둥지둥 가방을 챙겼다. 거울로 화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립스틱이 좀 번져있어서 휴지로 닦아냈다.


"김반장에게 서류 전달하고 은행 다녀올게요!"


"조심해서 다녀와. 요즘 날씨가 더워서 중간에 그늘에서 쉬면서 가."


김부장이 하품을 하며 답했다. 여전히 졸린 모양이었다. 점심 후 낮잠이 깊었던 것 같다.


미쓰리는 사무실을 나서며 기지개를 켰다. 앉아있느라 몸이 좀 뻐근했다.

오후의 따뜻한 햇살이 얼굴을 비쳤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이런 날에는 걸어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오전의 완벽한 업무 처리 덕분에 마음도 가벼웠다.

오후의 농땡이 타임도 충분히 즐겼고, 이제 간단한 심부름만 하면 하루 일과가 끝이었다.

미쓰리만의 완벽한 업무 패턴이었다.


현장으로 향하면서 미쓰리는 콧노래를 불렀다.

오늘같이 여유로운 하루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녀는 아직 몰랐다. 곧 시작될 예상치 못한 사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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