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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의 식탁의 기억

by 이다 Mar 0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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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여 전 교지에 이런 제목의 글을 썼다

식탁 위의 죽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다시 보니 아찔하도록 진지한 제목에 민망해져서 잠시 웃었지만 당시에는 고기 없는 식탁이 내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그 웃음은 곧 삼켜버리기로 한다)


채식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교지에 글을 싣기 위해 서울애니멀세이브라는 단체에서 주최하는 비질(도살장 앞을 찾아가, 고통받는 동물의 현실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일. 활동가들은 죽음 직전 한나절 넘게 물조차 마시지 못한 동물들에게 마지막 물과 먹이를 주며 건강상태를 살피고 기록한다) 소모임에 참여한 후, 경기 남부의 도살장의 냄새를 빼지 못한 그 며칠 동안 결정한 일이었다.


그때도 알고 있었던 것은 자주 헷갈려 하는 나약한 내 모습이었고 때문에 나의 비거니즘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땐 미처 몰랐던 것은 늘 단단하고 똑똑했던 나의 동료들도 실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편집회의 때마다 비건 옵션이 있는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고, 나처럼 너희들도 넘쳐나는 매끈한 플라스틱 앞에서 어떤 부끄러움과 비겁함을 느끼며 역시나 끊임없이 헷갈려 했을 것이다. 그래도 춤을 추며 실패와 싸우던 시간들. 내일의 실수같은 표정을 짓고 어제를 비관하며 매일 지겹게 찾아 오는 오늘과 싸웠었다.


비질 모임이 예정된 2021년 8월의 어느 날은 말복 하루 전이었고 수많은 동물들이 보양식이란 이름으로 죽어 나가는 날이기도 했다. 무언가 쓸 목적으로 죽을 생명들을 수단 삼는 것인지. 그와 비슷한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다는 죄책감과 죽음 직전의 그들을 마주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긴 밤을 헤매다 뜬 눈으로 아침을 맞았었다. 오전 6시 50분에 터미널서 만난 활동가 ㅈ, ㅊ과 함께 4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이동한 곳엔 도살장과 축산 도소매장을 제외한 어느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눈길이 닿기도 전에 잊혀질 법한 공간이었다. 강고한 직육면체 모양의 회색 건축물은 전혀 도살장처럼 보이지 않았고 동시에 문득 건물이 도살장처럼 보이려면 어떻게 생겨야 하는지 반문하기도 했다.


지면을 빌려 경기 남부 한 도살장의 이야기를, 핸드폰과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그 고통의 조각들을 부쳤지만 나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그 일을 그만두었다. 약 1년반 간의 짧은 채식을 그만둔 지도 2년이 넘었다. 이걸 인지할 때면 재작년 크리스마스 즈음 여전히 고기를 먹지 않는 일을 지속하고 있는 친구와 베를린에 가서 3박 4일 내내 비건 식당을 함께 찾아 헤매었을 때, 거짓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종일 음식이 속에 얹혔던 기억이 난다. 성탄절이 다가올 때면 여전히 그때가 생각난다. 이브날 점심 바덴 뷔틈베르크의 작은 도시에서 그를 만나러 베를린으로 출발하는 기차 안의 냄새까지.


채식인은 언제나 소수고 그들을 고깝게 보는 시선은 거르고 걸러도 압도적 다수다. 자초한 일이라고 한다면 할 수 없다.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느냐는 오지랖,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는 조소, 그렇다면 식물은 불쌍하지 않느냐는 비아냥.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 산다는 가벼운 혐오들. 그럼에도 누군가가 채식에 한 발 다가간다면 그 발걸음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추운 겨울 막 주차된 차의 온기라도 붙잡고픈 보닛 밑 고양이의 눈, 여행 중 만난 말과 소의 촉촉한 코, 9살에 처음 만나 16년의 시간을 온전히 함께한 너. 구제역으로 인해 산 채로 묻어지는, 자신과 같은 돼지들의 무게에 짓눌려 압사한 돼지의 고통, 멸종위기종임에도 웅담 채취 목적으로 평생 철장 안에서 길러지는 반달가슴곰과, 사람들의 진저리와 욕설 앞에 내놓아진 비둘기의 걸음.


성분표와 알레르기 성분을 살피는 일, 밥을 먹기로 한 지인에게 언제나 선택지를 건네며 사과를 해야 하는 일, 그 모든 일에서 자유로운 지금, 나는 언제나 편집실에서 모여 먹던 밥을 생각하고 같이 콩국수를 먹으러 가자며 사랑한다는 말이 뭔지 모르겠지만 사랑한다고 말한 동료의 말을 기억한다.


이슬아 작가가 말했듯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끊임없이 실패한 사람들은 자주 휘청거린다. 그리고 그들을 붙잡는 건 레비나스가 언급한 것처럼 늘 그들에게 다가오는 얼굴에서 비롯한다.


수전 손택은 이렇게 썼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그 글에서 오래 머물다 썼던 글을 오랜만에 보니 다시 도망쳤던 것으로 돌아가고 싶은 3월이다. 모르는 얼굴, 혹은 모르지만 알고 싶은 얼굴들에 다가가는 일. 모두 네게 배운 것들이다.


꾸짖는 사람 없는 일임에도 고집을 부리는 제가 대견하다가도 동시에 어느 미래에 맛보게 될 좌절이 두렵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계절이 언제 새 이름을 가지는지 아시나요. 여름에서 가을, 한 뼘 남짓한 계절을 통과하던 어느날, 손택이 남긴 이 글목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다 소극적인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이 작은 발걸음이, 다른 누군가에게 최초의 발걸음을 선사하길 소망합니다. 그 최초와 최선의 발걸음들이 모여 평화와 정의와 사랑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그리운 바람을 담아서요.
이 순간에도 죽음의 문턱 앞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을 동물들과 한 번도 지친 기색 없던 성원들의 따뜻한 응원. 수많은 이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글을 마칩니다. 우리의 지금이 미래에는 믿기 어려운 과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은 오늘을 살아내고 더 나은 내일로 가기 위한 다짐입니다. 연민과 분노가, 사랑과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그렇게 걸어보고 싶습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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