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여행이었어.

by 연꽃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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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 문 밖을 나섭니다. 아파트 주차장을 지날 때 나를 앞질러 빠르게 달려갑니다. 놀이터에서는 걸음이 조금 느려집니다.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깜박이자 조급한 마음이 드는지 다시 달려보지만 신호등은 얄밉게 빨간불로 바뀝니다. 잠시 멈춰선 듯하더니 얄미운 빨간 신호등을 지나쳐 다음 횡단보도를 향합니다.


아이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저 방금 초록불이 우리를 기다려주었다면 얼마나 완벽하게 그 곳까지 갈 수 있었는지를 아쉬워하며 그저 자기만 따라오면 된다고 말합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아이의 발걸음은 더 힘차고 빨라집니다. 자신이 마음 먹은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는 향하는 발걸음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인지 잡았던 손까지 놓고 달음질 칩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목적지는 학교 앞 문방구입니다.


문방구 입구에서부터 이것저것 물건들을 만져보고 뒤적이며 들어갑니다. 온갖 까다로운 어린이 손님들을 상대했을 사장님은 아이를 보았지만 인사도 없이 하던 일을 계속합니다. 아이는 포켓몬스터의 지우처럼 ‘너로 정했다’는 미소를 띠고 계산대 앞에 놓인 포켓몬 앨범을 향해 손을 뻗습니다. 아이는 꼼꼼히 살펴보더니 디자인은 마음에 드는데 약간 흠집이 있다고 혼잣말인지 사장님을 향한 말인지 중얼거립니다. 사장님은 무심한 계산대 뒤쪽으로 가시더니 슬쩍 물건을 아이를 향해 내밉니다. 거기에 더해 커다란 포켓몬 포스터도 한 장 건넵니다.


"이 포스터 오늘 들어와서 네가 처음 가져가는 거야."


이 말을 듣고 “감사합니다”고 하면 좋으련만…


"끝에 약간 접혔네요."


그래도 얼굴 가득 미소는 사라지지 않고 밝게 웃으니 사장님도 슬며시 웃습니다. 혹시나 포스터가 구겨져 괜한 원망을 들을까 '외출'을 황급히 끝내려고 이번에 제가 횡단보도를 향해 빠르게 걸어갑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길가의 꼬치 가게에 멈춰 섭니다. 포스터에 뭐가 묻을 수도 있으니 그냥 가자고 하는 말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아이의 발걸음은 거침없이 가게 안으로 향합니다.


"소떡소떡 카레맛이요"


아빠와 함께 왔던 곳이라며 주문까지 익숙하게 합니다. 그리고 메뉴판에 적힌 글씨들을 읽어 내려갑니다.


"바비큐, 치즈, 칠리.....5만원?"


5만원 소리에 기름에 소떡소떡을 튀기던 사장님의 얼굴에 미소가 번집니다.


"5만원에 팔면 뉴스에 나와. 그래도 우리 가게에서 파는 음식을 5만원에 판다고 생각해주니 기분 좋네."


그리고 괜스레 몇 살이냐,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아서 5만원으로 잘못 읽었구나, 키가 또래보다 커 보인다, 우리 가게에서 먹어봤냐, 그러면 소스를 양쪽으로 발라주겠다며 과묵해 보이시던 사장님의 입과 함께 마음도 트인 듯합니다.


포스터와 포켓몬 앨범, 양쪽에 소스가 듬뿍 발린 소떡소떡까지 챙겨 집으로 왔습니다. 소스가 포켓몬 앨범이나 포스터에 묻는 날에는 어떤 원망을 듣게 될지 모르니 마음이 더 급해졌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나를 보며 말합니다.


"참 좋은 여행이었어."


얼른 집으로 돌아가 마침표를 찍고 싶은 일련의 일들을 아이는 '여행'이라고 말합니다. 코로나 이후로 우리에게 참으로 큰 목마름을 주는 단어인 '여행'을 아이의 입에서 들으니 더 달콤했습니다. 이토록 짧고 단순한 동선의 시간들도 '여행'이 되는구나! 생각해 보니 오늘 저도 아이와 함께 참 좋은 여행을 했습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우연한 친절처럼 문방구 사장님이 흔쾌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여행지 식당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괜히 마음을 여는 대화를 하듯이 꼬치 가게 사장님과의 짧은 대화도 참 따뜻했습니다.


아이와 함께 문 밖을 나서니 '외출'도 '여행'이 됩니다. 저도 아이에게 말합니다.


"그래, 참 좋은 여행이었어. 너랑 같이 가서 더 좋은 여행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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