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트렁크를 정리했습니다. 자동차 트렁크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참호 같은 곳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뭔가 필요할 때 얼른 꺼낼 수 있도록 물건들을 하나 둘 가져다 두다 보니 어느 순간 트렁크의 역할은 하지 못하는 그런 곳이 되어 있었습니다.
장을 보고 나서 물건을 싣으려고 열었다가 누가 볼까 창피해서 얼른 트렁크 문을 닫고 힘겹게 뒷좌석에 물건을 실어야 할 때도 많았습니다. 아이의 자전거를 사러 갔을 때는 뒷좌석에 자전거가 들어가지 않아서 자전거를 올려 주러 오신 사장님 앞에서 트렁크의 물건을 뒷좌석으로 옮기느라 땀을 뻘뻘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배드민턴 라켓, 발목 줄넘기, 금붕어 먹이, 곤충 채집망, 비눗방울 등 뭔가를 요청할 때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두었지! 짜잔!' 하면 트렁크에서 물건을 찾아 줄 때 어깨가 으쓱했습니다. 책가방을 집에 가져다 둘 새도 없이 책가방은 차에 두고 다시 차에서 필요한 물건을 꺼내 놀이터로 공원으로 다니기 위해서 트렁크의 참호화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전 아이 친구 가족들과 급하게 해수욕장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게 되었습니다. 해가 져가는 저녁 시간이라 정신없이 아이에게 수영복을 입히고 재촉하는 아이를 진정시키며 대충 돗자리와 구명조끼, 튜브를 챙겼습니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해질녘인데도 주차장은 혼잡했습니다. 트렁크 구석에 만일을 대비하여 넣어둔 모래 놀이 장난감과 물총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챙겨 놓은 돗자리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혼잡한 주차장에서 아이를 단속하며 모래사장으로 갔습니다. 먼저 도착한 아이 친구의 엄마는 캠핑 의자에 앉아 있고 간이 테이블에는 과자와 음료수가 보였습니다. 순간 챙겨 오지 못한 캠핑 의자가 떠올랐습니다.
아이의 친구는 우리가 가져간 물총을 보더니 다급해집니다.
"엄마, 내 물총은?"
"물총이 필요하면 네가 챙겼어야지."
아이의 친구는 튜브도 물총도 챙겨 오지 못해서 몇 번 볼멘소리를 하더니 금세 포기하고 같이 놀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놀기 시작하자 저도 돗자리를 깔고 앉아 해지는 바다를 바라봅니다.
"여기 의자에 앉으세요. 저희 남편 보고 돗자리에 앉으라고 할게요."
"아니에요. 모래 위라서 딱딱하지 않고 괜찮아요. 갑자기 오게 돼서 급하게 오느라 대충 챙기고 왔네요."
"물총이랑 튜브까지 엄청 준비하셨는데요! 저희는 일부러 제가 안 챙기고 애들한테 필요한 건 알아서 챙기라고 해요. 나중에 정리하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캠핑 의자랑 테이블은 항상 차에 싣고 나니는 거고요."
그 순간 캠핑 의자와 테이블만 있는 자동차 트렁크가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캠핑 의자와 테이블을 '만일의 사태'로 준비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장난감과 물건들로 가득 채워놓고 찾아올 '만일의 사태'를 준비했던 저에게는 정말 딱 그런 '만일' 밖에 생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이와 함께 곤충을 잡고 공원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가끔씩 비눗방울 놀이를 하고, 아파트 연못에 있는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는 만일들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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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 의자와 테이블을 준비하면 어떤 만일이 생길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놀이터와 공원에서 그늘진 벤치를 찾아 앉고, 그늘이 없는 시간에는 나무 그늘 아래 서서 아이를 지켜보는 대신에 그늘 아래 의자를 펼쳐 놓고 앉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와 함께 먼 외출을 하는 길에 좋은 풍경을 만나면 잠깐 차를 세워 의자에 앉아 풍경을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시골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늘 눈으로만 봐 두었던 바람 좋은 언덕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집에서 간식 몇 개, 커피 두 잔 챙겨 가서 테이블을 펼치고 앉아 바람에 간식이 날아갈까 한 손으로 잡고, '편안한 집 두고 왜 여기서 이렇게 먹어야 하냐'는 아버지의 핀잔을 들으며 눈이 시원해지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혼자 보내는 시간에도 캠핑 의자 깔고 테이블을 옆에 두면 잘 차려놓은 나만의 공간이 어디는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며 참 든든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트렁크를 정리했습니다.
스스로 필요한 물건은 챙겨갈 수 있도록 문 앞에 유리 장식장 안에 아이의 물건들을 옮겨서 정리했습니다. 트렁크가 비어 갈수록 마음은 설렘으로 차오릅니다. 이제 제가 상상했던 다른 만일들이 이 좋은 계절 가을에 저를 찾아올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