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라이브 단상
이름은 모르지만 자주 봐서 익숙한 몸짓과 동선을 보여주는 아이들, 같은 시간에 주변을 맴도는 비둘기, 검은색 배낭을 메고 올드팝을 들으며 놀이터 트랙을 도는 짧은 머리가 경쾌해 보이는 어르신, 태권도복을 입고 나무 위에 올라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아이들, 주식부터 비트코인에 이어 부동산까지 신나게 이야기를 하다가 ‘알고는 있지만 쫄보라서 직접 투자하지는 못해’라며 맥없이 대화를 매듭짓는 어른들까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고, 보고 싶지만 대놓고 보기는 민망한, 사람들과 생명이 밀물과 썰물처럼 나름의 약속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 강아지가 함께 산책을 오시는 아저씨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목줄을 잡고 있는 말없는 아저씨 옆 강아지를 향해 경계를 무너뜨리며 다가갑니다.
“저기, 강아지!”
이 한마디가 준비, 땅 신호라도 되었는지 멀리 있던 아이들까지 결승선을 향해 달리기를 하듯 몰려듭니다. 강아지는 잔뜩 겁을 먹은 것처럼 고개를 몸 쪽으로 기울여 몸을 말듯이 절뚝거립니다. 그런데 또 그런 관심들이 싫지는 않은지 꼬리는 쉬지 않고 흔듭니다. 강아지는 뭔가 아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이들의 소란함에 정신이 아득해진 것 같기도 합니다. 아이들을 뒤따라온 엄마들이 목줄을 쥔 아저씨가 혹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지는 않는지 눈치를 보며 강아지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아이들을 나무랍니다.
“얘가 수술비만 1억이 들었어요. 사고가 나서. 원래 아이들이 키우던 거예요. 전 강아지 별로 안 좋아해요. 근데 아이들이 다 집을 떠나고 나니까 얘만 남았네요.”
목줄을 쥔 아저씨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미소가 엿보이는 목소리로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강아지와 아저씨의 시간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별로 좋아하지 않던 강아지와 아저씨를 사이를 이어주던 자녀들은 지금, 여기에는 없습니다. 애정을 주었던 공통의 대상인 자녀들이 떠난 자리에서 끈끈한 끈으로 이어진 아저씨와 강아지의 모습에 괜히 마음 한편이 뜨거워졌습니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아마 강아지와 자녀들이 더 자주 이 놀이터에 나오지 않았을까요?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강아지가 다쳐서 가족을 치유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수고를 들이는 동안 아저씨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다시 이 놀이터로 나올 때까지 강아지와 아저씨 사이에는 어떤 마음이 오고 갔을까?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떤 생명 사이에서도 생길 수 있는 마음 같습니다. 사람을 깊이 사랑해 본 사람이라면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 ‘생명’ 자체에 대한 애정이 샘솟음을 느끼게 되는 순간을 알 겁니다.
아이와 함께 놀이터에 나와서 벚꽃이 피고 지고 다시 초록이 더해가는 모습, 어느 순간 넓은 영역을 차지하며 존재감을 나타내는 소박한 클로버의 모습, 젖은 낙엽을 들춰내면 몸을 웅크린 채 모여있는 공벌레 무리, 꽤 단단한 흙을 부드러운 이불처럼 덮고 그 속에서 얼마나 넓은 세계를 만들고 있을지 모를 개미떼, 아이들이 흘린 과자며 간식을 부지런히 흔적도 없이 치워버리는 식성 좋은 비둘기들.
아이들은 저마다의 취향에 따라 그 생명들과 관계를 맺고 어른들은 불러주지 않는 그 생명들의 이름을 생기 있게 부르며 놀이터의 시간을 삽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오늘도 여전히 이 놀이터에 생명들이 들끓고 있음을 느낍니다.
아이를 깊이 사랑할수록 만나는 모든 생명에 대한 애정이 샘솟습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서 미움과 분노가 들어설 공간이 없는 충만함을 아주 잠깐이지만 느낍니다. 그냥 그대로 존재해서 참 고마운 생명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