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free한 사흘_화엄사 템플스테이

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니, 태평양의 끝>

by 필우

퇴직하면 두세 달 동안 절에 머물 계획을 세웠습니다. 시끄러운 삶을 내려두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고 여유를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아내는 '그때가 되면 찾는 사람도 없을 거고 하루 종일 여유는 넘쳐흐를 건데 절에 들어가고 싶겠나? 돈 써가며', 하고 반문했습니다.


나이 서른이 되면, 승진하고 나면, 아이가 졸업하고 나면, 직장을 그만 두면, 나이 육십이 되면,... 미래에 하고싶은 일을 계획만 하다가 정말 그 시간이 오면 이 핑계 저 핑계로 실천하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지금 저는 시간은 없고 수입은 있습니다. 시간에 쫒겨다니는 저는 한적한 사찰에서 여유를 즐기는 삶이 부럽습니다. 1박에 5만 원은 저의 수입으로 감내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퇴직하고 나면 저는 시간은 많고 수입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저렴한 템플스테이를 구한다 해도 두 달 정도 머물게 되면 1백만 원 이상은 필요합니다. 예상해보건데 그때가 되면 만 원짜리 한 장도 선뜻 내놓지 못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지금 제가 소망하는 것은 저의 환경과 삶의 조건이 바뀐 상황에서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가자, 템플스테이


템플스테이에 관심을 가지면서 온라인에서 정보를 얻고 예약까지 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몇 번의 클릭만으로도 사찰을 선택하고, 날짜와 프로그램을 고르는 것까지 쉽게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템플스테이가 처음이기때문에 시스템이 잘 되어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큰 사찰을 택했습니다. 전남 구례에 있는 화엄사에서 2박 3일 동안 머물기로 했습니다. 사찰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저는 '체험형'보다는 밥먹고 잠자는 '휴식형'이 좋았습니다. 1박에 5만 원이지만 혼자 쓰는 방은 추가 2만 원을 더 부담해야 했습니다. 입금까지 완료하고 준비 끝.


첫째 날


입소 당일 3시 반까지 절에 도착해서 방을 배정받고 오리엔테이션을 받았습니다. 화엄사 템플스테이는 일주문을 지나 왼쪽에 별도 건물과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사찰에서 단체복을 나눠 주었습니다. 회색 바지는 풍덩해서 체형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맞았습니다. 조끼는 분홍색이지만 남자가 입어도 어울렸습니다. 뜨거운 햇살 아래 문화해설사가 사찰 여기저기를 구경시켜줬습니다.


저녁 공양시간은 오후 5시 20분, 템플스테이 참석자들이 모여서 함께 출발하였습니다. 10여 명이 안내자를 졸졸 따라 식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입구에서 잠시 대기하다가 식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스님과 같은 공간을 사용했지만 템플스테이 좌석은 별도 표시가 되어 있어 일행은 옹기종기 모여서 식사를 했습니다. 식당 안쪽에는 스님들이 드문드문 앉아 엄숙한 모습으로 공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식당안은 절간이었습니다. 조용했습니다.


뷔페식이었습니다. 야채, 나물, 버섯, 미역국, 다양한 김치(배추, 깍두기, 열무)가 늘어섰습니다. 큰 종기에 밥과 함께 반찬을 가지런히 담았습니다. 물김치와 미역국은 작은 그릇에 따로 담았습니다. 신선하고 건강한 맛이었습니다. 둘째 날 점심까지는 그랬습니다. 다 먹고 나서 식기와 수저는 별도 세척 공간에서 깨끗이 씻어 건조기에 넣었습니다.


저녁 식사 후 혼자 사찰을 산책했습니다. 방에 들어와서는 독서 조금, 노트북으로 인터넷 조금하다 자리에 누웠습니다. 산속이지만 더웠습니다. 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여러 번 깨다 자다 반복했습니다.


둘째 날, 셋째 날


아침 공양은 새벽 5시 50분, 산책하고 책 읽는 동안 오전시간이 다갔습니다. 점심 공양 후 산책하고 사찰 입구의 선물 파는 집에서 커피 한잔 마시면서 야외에서 책 읽기, 저녁 식사 후에는 스님의 사물놀이 연주를 감상했습니다. 법고(북), 운판(쇠로 만든 구름모양의 판), 목어(나무로 만든 물고기 모양), 범종(종)을 차례로 스님들이 연주했습니다. 연주라기보다는 일정한 시간을 두고 강약을 조절하여 두드렸습니다. 중생이나 미물에게 소리를 들려주어 깨우침을 준다는 해설사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마지막 날, 건강한 식단이 질리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아침 공양은 생략하고 1시간 정도 잠을 더 청했습니다. 코로나에 걸린 아버지를 뵈러 일찍 사찰을 떠났습니다.


배려-free한 사흘


화엄사는 현대식이었습니다. 음식도, 건물도 깨끗했습니다. 화엄사가 깊은 산속에 자리잡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불편했습니다. 의자가 없었고 더웠습니다. 밤에는 너무 조용해서 옆 방 아이의 울음소리와 템플스테이 참석자끼리 도란거리는 말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조용해서 시끄러웠습니다.


이번 템플스테이가 제게 주는 여러 의미들이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혼자 지내는 즐거움을 만끽한 것입니다. 다른 일행은 가족, 연인, 친구끼리 온 것 같았습니다. 저는 혼자였기에 방 어느 구석을 차지할지 물어보지 않고 눈치 보지 않았습니다. 불을 언제 끄야 할지, 먼저 씻어야 할지, 4사자 삼층석탑(네 마리의 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석탑)을 보러 갈지 물어보지 않고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발을 움직였습니다. 때로는 발이 자기 마음대로 내질렀습니다.


더워도 사찰을 돌아다니고 땀이 흘러도 방에 박혀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견딜만한 고통에 나를 던져두고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둘이나 셋이 함께 있었으면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늘 '배려'라는 이름으로 눈치만 보고 살았던 제게 사흘 동안은 '배려-프리'(배려-free)한 시간이었습니다. 가끔 이렇게 살아도 좋겠습니다. 언젠가는 이렇게 살아가야 하겠지만.


혼자 살게 된 사람의 이야기, <방드르니, 태평양의 끝> 이야기를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미셀 투르니에 <방드르니, 태평양의 끝>


"로빈슨은 자신이 멸망해 가는 것을 느꼈다. 인간이라는 한 피조물이 이처럼 잔혹한 시련 속에 놓였던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내 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품인 타인......, 그에게서 얼마나 대단한 덕을 보고 있었던가를 나는 내 개인이라는 건물 속에 새로운 균열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매일 헤아려보게 된다."


'버지니아호'의 유일한 생존자인 로빈슨이 정신을 차린 곳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섬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을 '탄식의 섬'으로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이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에서는 그가 혼신을 들여 만든 '탈출호'를 바다에 띄우지 못하고 절망한 후, 섬에 적응하면서 질서를 부여합니다.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원형을 따르는 듯하면서 변형시켰습니다. 이 책의 로빈슨은 자기가 머무르는 섬을 희망의 섬, '스페란차'라고 고쳐 부르면서 인격을 부여하고 사랑하는 차원으로까지 관계를 발전시켰습니다.


후반부는 원주민의 제사의식에서 제물로 희생될 뻔한 흑인과의 만남과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로빈슨은 그를 '방드르디'(금요일)라 부르기로 하고 '반쯤은 생명이 있고 반쯤은 추상적인 이름으로, 시간적이고 우연적이며 마치 일화적인 것 같은 성격이 강하게 깃들어 있다.'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주인과 노인의 관계에서 동반자 관계로, 서로의 거울이 되는 관계로 변해갑니다. 로빈슨이 섬에 부여한 질서는 방드르니의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둔 행동에 의해 무너졌으며 로빈슨도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방드르니)의 헌신적이 노력과 두려움을 모르는 논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로빈슨)는 처음으로 자기가 느끼는 예민한 구역질 등 그 모든 백인 특유의 신경반응이 과연 최종적이며 고귀한 문명의 보증일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새로운 삶에 접어들기 위하여 언젠가는 팽개쳐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죽은 찌꺼기 일지를 자문해 보았다."


"스페란차는 이제 기름진 땅으로 가꾸어야 할 황무지가 아니다. 방드르니는 이제 내가 교육시켜야 할 야만인이 아니다. (중략) 내가 그들을 처음 발견하는 듯한 느낌이 들고, 그들이 지닌 마술적이라 할 만한 새로운 그 무엇에 의해서도 흐려지지 않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로빈슨과 방드르니의 관계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나'와 조르바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조르바의 질문 중, '왜 사람들은 죽는 것일까요?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책에 없다면 대체 뭐가 쓰여 있는 거요?', 라는 대사가 나의 독서록에 남아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로빈슨과 방드르니는 서로를 좀 더 화학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마침내 오랜 세월, 28여 년이 지난 후 매끈한 상선 한 척이 스페란차에 도착하면서 로빈슨은 중대한 결심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섬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이 그에게는 최초의 시작이었으며 세계사의 절대적인 시작이었다. 하나님이신 태양 아래서 스페란차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원한 현재 속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어떤 완벽한 극한점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 영원한 순간으로부터 몸을 빼내어 피폐와 먼지와 폐허의 세계 속으로 추락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는 철학적인 방향이 다르다고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비인간적인 고독으로 인하여 한 인간의 존재와 삶이 마모되고 바탕에서부터 발가벗겨짐으로써 그가 지녔던 일체의 문명적 요소가 깎여가는 과정과 그 근원적 싹쓸이 위에서 창조되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그렸다.'라고 합니다.


저는 이 소설을 타자(나 이외의 것)와 타인에 대한 이야기,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앞부분은 자기 외에는 인간이 없는 섬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나 이외의 어떤 것, 즉 거처를 만들고 가축을 길렀으며 식량을 비축하고 스스로 총독이 되고 법을 만들었습니다. 뒷부분에서는 방드르니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존재한다(Exister)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밖에 있다(sistere ex)는 뜻이다. 밖에 있는 것은 존재하고 안에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 나의 이미지, 나의 꿈은 존재하지 않는다...나 역시 나 자신으로부터 타인 쪽으로 도망쳐나감으로써만 존재한다."


소설의 끝 부분에서 로빈슨은 마침내 완벽하게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현재의 삶을 구축하게 된 것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전혀 새로운 세계'는 나 이외의 것에서 나를 구하지 않고 나로 말미암은 나를 만들어가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소설은 그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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