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iipark Feb 07. 2022

짱깸뽀

잠깐의 수고를 참지 못하는 이들이 외면하는 역사에 대해

어릴 적 문구점 앞 오락기들 사이에 "짱깸뽀"라고 불리던 빠칭코 머신이 있었다. 동전을 넣고 가위바위보에 이기면 메달을 주는 기계였다. 최대치인 x20에 걸리면 20개까지 한 번에 받을 수 있었는데, 바로 앞 문구점에서 1개에 100원의 가치인 일종의 화폐였다. 어느 날엔가 나는 우연하게 그 기계가 반복적인 패턴을 행하는 걸 발견했고, 작은 수첩을 가져와 그걸 기록하기 시작했다. 데이터가 일정하게 쌓이고서부터는 추측이 확신이 되었다. 그리고는 그냥 기계의 코드를 한번 뽑았다가, 꽂았다. 초기화가 된 짱깸뽀는 수첩에 적혀있는 순서대로 코인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꽝, 두 번째에는 1개, 세 번째는 꽝, 네 번째에는 2개.. 동네 아이들은 돈을 잃기 위해 도전했고, 나는 뒤에서 지켜보다가 이기는 타이밍에 아무도 없으면 슬쩍 다가가서 베팅을 했다. 50회쯤까지 적어놓은 데이터 안에서 x20배가 터지면 친구들은 환호했고, 들뜬 분위기가 잠잠해질 때쯤 나는 다시 코드를 뽑았다가 꽂았다.


그러던 어느 날에는 20분쯤 걸어가면 되는 옆 동네에 같은 기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메달 1개를 현금 50원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억지로 문구를 살 필요가 없는 데다가 잘만 하면 좋아하는 떡볶이를 매일 공짜로 먹을 기회였다. 패턴이 같은 기계 일지는 모를 일이지만 수고로운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나는 원래의 기계에서 하던 대로 메달을 모았고, 20분을 걸으면 떡볶이를 살 수 있는 돈이 되었다. 오락기가 네 대쯤 있던 그 공간에서 어느샌가 나는 왕이 되었다. 아무런 기능도 없는 세 개의 버튼을 내가 두드리면 메달이 나왔다. 일정한 패턴으로 빠르게 연타해서 마치 이기는 공식이 있는 것 같은 연출을 하기도 했다. 어떤 친구들은 나를 따라서 버튼을 두들겼지만 여전히 딸 때보다 잃는 때가 많았다.


문구점 아저씨와 나의 배만 불러가는 게 신경 쓰이기 시작할 때쯤 나는 이 무적의 시스템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그 기계는 폐기가 되어야 했다. 아무도 패하는 타이밍에 베팅을 하지 않을 거니까. 나는 친했던 4학년 친구들, 2학년 동생들 몇몇에게 수첩을 보여줘 가며 내가 이겨왔던 경위에 대해 설명했다. "짱깸뽀"에서 연전연승을 이어갈 때의 환호성 같은 걸 은근히 기대했지만 단 한 명도 이걸 신기해하지 않았다.


 "아 형이 그래서 계속 이겼구나. 그런데 형아, 난 아까 떡꼬치를 사 먹고 킹오파를 해서 오늘 돈이 없어. 어차피 내일 또 엄마가 500원을 줄 거야"


다들 나에겐 보물 같은 그 수첩보다는, 킹오브97의 쿄를 잘 쓰던 어떤 친구가 다섯을 넘게 연속으로 이기는 것에 열광했다. 나는 네댓 명쯤에게 이걸 설명하다가 그 한결같이 실망스러운 반응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다가 그냥 친구들은 이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구나, 정도로 이해했다. 더 재밌던 것은 그들은 그 이후로도 떡꼬치를 사 먹고 남는 100원을 또다시 그 게임에 베팅했다는 점이다. 이제 나는 그 수첩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승리의 기회는 전과 같이 주어졌고, 그래서 그들은 예전과 똑같이 잃기도 하고 따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 조금만 노력해도 그들은 100% 이길 수 있었다. 행운에 기대기보다는 규칙에 기댄다면 말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를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냥 그게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 시절, 당시 유행하던 바람의나라라는 온라인게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기간이 한정된 이벤트가 열렸는데, 사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정 숫자 아이템 5개를 모아서 빙고를 맞추면 어떤 확률형 아이템이 지급되는 단순한 빙고게임이었다. 숫자가 랜덤으로 주어지는 데다가, 매일마다 빙고로 맞출 수 있는 숫자열은 바뀌어서 사람들은 숫자를 서로 교환하기 시작했다. 재밌던 것은 개별 숫자는 각각 3만원이였던 반면에, 5개를 모으면 만들어지는 박스는 20만원이 넘었다. 그리고 빙고가 되는 숫자는 계속 바뀌었지만, 숫자아이템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내게는 귀찮은 일을 대신해주고 받는 대가가 그 수고로움에 비해 너무 큰 시장처럼 보였다. 나는 떡꼬치를 먹고 남는 돈을 "짱깸뽀"에 버려버리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당시 내가 가진 게임머니는 60만원 정도 있었는데, 나는 그 돈으로 빙고에 해당하는 숫자 20개를 샀고 박스 4개를 만들어 대충 80만원 쯤을 만들었다. 그걸 몇 번 반복해서 돈이 몇 백 수준이 되었을 때쯤부터는 나는 모든 숫자를 가리지 않고 사모았다. 이제 매주 숫자열이 바뀌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었다. 나는 모든 숫자가 충분히 있었고, 박스는 여전히 20만원이 넘었다. 그 이벤트가 종료된 이후로도 그 게임 속에서는 여러 번 형태만 조금씩 바뀐 "짱깸뽀" 사태가 일어나곤 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코드를 뽑았다가 꽂았다. 게임을 그만둘 때쯤에 내가 가진 게임머니는 대충 8억원이였다. 그 게임머니는 진짜 돈 300만원으로 바꿨고 엄마가 갖고 싶다하시던 모피코트를 샀었다.


다른 게임에서처럼 현실에서도 "짱깸뽀" 사태는 일어났다. 늘상 눈에 보이는 수고로움을 애써 외면하던 친구들은 예정되어 있던 실패를 맛봤다. 몇 번의 작은 성공에 도취되었기 때문이었을까. 나 역시도 현실 속의 수고로움은 대부분 이겨내지 못했다. 대학시절에 스쿠터를 사기 위해 1년여간 알바비를 꼬깃꼬깃 모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정작 모은 4백 십몇만원으로 "때는 이때다"라며 주식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때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이 세상의 모든 주식들이 바닥 쳤던 시기였다. 나의 참전 선포 이후 이틀 후부터 모든 주식들은 반대로 치솟기 시작했다. 처음 샀던 두 주식은 그날 모두 상한가로 갔다. 그리고 마법같이, 24살의 나는 수개월간 딱 3,787,000원을 잃었다. 자본시장이 앗아간 것을 되찾기 위해서 나는 회계공부를 하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4년여의 회계법인 생활을 마무리한지 약 6개월 후, 짧은 휴식이 끝나고 나는 증권사에서 새 시작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마치 신께서 일부러 투자기회를 준비해주신 것처럼 취업도 대출도 해결된 직후부터 주식시장은 대 바겐세일을 시작했다. 코로나 발로 터진 이번 금융위기는 08년의 서브프라임 사태 때나 11년의 유럽 재정위기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증권사에서의 최종면접 때 앞으로의 주식시장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지금은 대체투자가 압도적인 시기지만, 곧 2030세대에게 주식 붐이 일겁니다."


정보 과잉 상태에서 살아온 이 세대는 적은 양의 지식만을 가지고도 과거의 시장행태에 대해 인터넷 검색 몇 번으로 어제 겪은 것처럼 확인할 수 있다. 지구 건너편에 사는 제롬 파웰이 하는 말을 조금의 타임 로스도 없이 동 시간대에 수신할 수 있다. 얼굴도 모르는 수백 명과 정보를 공유하는 데에는 누울 수 있는 침대와 핸드폰만 있으면 될 뿐, 조금의 비용도 들지 않는다. 이런 이 세대에게 코인판은 부당하고, 부동산은 불가능한 이제, 머나먼 달나라 같은 꿈을 만족시켜 줄 것은 주식밖에 없어 보인다. 다만 이제까지는 그들이 진입하기에 이 시장이 매력적이지 않았을 뿐이다.


이번에 진입한 세대들은 이 판을 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번 코로나가 환희가 될지 절망이 될지 모르지만, 이전과 달리 투자에 대한 히스토리와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기 너무나 쉬운 세상에서, 그들은 그것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살아남는 모든 것은 오르게 되어있다. 하지만, 여전히 오랜 기간 동안을 선배들이 그러했듯 후학들 역시 꿈틀거리는 돈의 흐름 속에서 수년간 웃고 울고를 반복할 것이다. 살아남는 자도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 있다. 몇 년 뒤에 오를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눈앞의 손실을 감당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으니까. 어쩌면 주식시장도 다들 어떻게 상황을 대하면 될지 알면서도 그 수고로움 자체에 쉽게 피로감을 느끼는, 또 하나의 짱깸뽀 게임이 아닐까.


처음으로 "짱깸뽀"사태에서 패배를 맞이했던 2008년을 기억한다. 3,878,000원을 보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난관을 거쳐서 여기까지 왔다. 총알이 있다. 경험이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거짓말처럼 증권가의 한가운데 있다. 모든 것이 나를 위해 맞추어진 것만 같다. 이번 "짱깸뽀"는 꼭 이겼으면 좋겠다. 몇 번의 동전을 넣고 가위바위보에 지면서 나는 마음속 수첩에 여러가지를 새겨 두었다. 그리고 이번 판에서 나는 늘 그랬듯 코드를 뽑았다가 꽂고서 잠시 기다릴 것이다. 때는 올 것이다.



2020. 3. 20. 씀

이전 04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