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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May 02. 2024

다시 읽는 에피쿠로스의 쾌락론 10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 마르크스 2

우리는 이 두 사람이 한 걸음 한걸음 끝없이 대립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한 사람(데모크리토스)은 회의론자이고, 다른 한 사람(에피쿠로스)은 독단론자이다. 한 사람(데모크리토스)은 감각적 세계를 주관적 가상으로, 다른 한 사람(에피쿠로스)은 이를 객관적 현상으로 생각한다.


감각 세계를 객관적 가상으로 간주하고 있는 사람은 경험적 자연과학과 실증적 지식에 전념한다. 그리고 그는 도처에서 배우면서 멀리 배회하는 경험적 관찰의 불안을 보여준다. 현상세계를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은 경험을 경멸한다. 자신에 만족한 사유의 평정, 자립성, 내적 원리에서 끌어올린 지식인 자립성을 구체화한다.


그러나 모순은 훨씬 더 날카로워진다. 감각적 자연을 주관적 가상으로 생각하는 회의론자이며 동시에 경험론자인 사람 (데모크리토스)는 감각적 자연을 필연성의 관점에서 고찰하며 사물의 실재적 존재를 설명. 파악하려고 애쓴다.


반대로 현상을 실제로 생각하는 철학자이며 동시에 독단론자인 사람(에피쿠로스)은, 도처에서 단지 우연만을 고찰한다. 그의 설명 방법은 오히려 자연의 모든 객관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데 있다. 이와 같은 대립에는 어떤 부조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집에서 서로 모순적인 이 두 사람이, 하나의 동일한 교설에 집착할 것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추측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서로 연결된 것 같다.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카를 마르크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두 자연철학자는 서로 반대의 견해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데모크리토스는 눈에 보이는 감각적 현상을 가상으로 본다. 왜냐하면 자연의 본질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원자와 진공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그와 반대의 입장이다.


마르크스는 두 철학자의 유물론적 기초 위에서 데모크리토스의 필연에 에피쿠로스의 우연을 종합하려 한다. 자연 현상이 필연적 법칙에 의해 종속된 결정론적 체계라면, 인간의 영혼 역시 자유의지가 없게 된다.


“몇몇 사람이 만물의 지배자로 도입한 필연성은 없다. 그러나 어떤 것은 우연적이고 다른 어떤 것은 우리의 자의에 달려있다. 필연성은 설득할 수 없고, 이에 비하여 우연성은 불안정하다.


자연학자들이 부과한 운명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신들에 관한 신화를 따르는 편이 더 낫다. 왜냐하면 신화는 인간이 신들을 존경하기 때문에 자비를 희망할 수 있게 하나 운명은 인간에게 가혹한 필연성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이 아니라 우연을, 다수가 믿는 바와 같이, 수용해야 한다.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철학은 영국 경제학과 독일 관념론 그리고 프랑스 공산주의를 변증법적으로 지양-종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학에서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를 그리고 관념론에서는 인간의 역사적 실천과 자유를, 공산주의에서는 그 양자의 필연과 자유의 종합의 목적으로써 유토피아의 이념을 복원시킨다.

논문의 말미에서 마르크스는 루크레티우스의 에피쿠로스 찬가를 소개한다.


“만인의 면전에서 인간이 굴욕스러운 삶을 지상에서겪으며 무겁게 억누르는 종교의 짐에 굴복되었을 때하늘위의 높은 곳에서 그(종교) 머리를 내밀고 무서운 얼굴상으로 인류를 위협적으로 협박할 때 최초로 한 그리스인이 버릇없이 죽을 운명의 눈을 치켜세우고 이 무서운 모습에 냉담하게 버티었다. 신들의 우화도, 하늘의 번개와 천둥도 그들의 위협으로 그를 주지 못한다… 따라서 인과응보로써 종교가 우리에게 무릎을 꿇고 있으며 그가 완전히 승리하며, 그의 승리가 우리를 하늘로 헹가래 치고 있다.”


논문의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제우스 신의 종복, 헤르메스에게 프로메테우스가 답한 것과 같은 태도를 가지고 철학을 시작한다. “이걸 확신하라. 나는 나의 비천한 운명을 당신의 예속과 바꾸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 제우스의 사자가 되는 것보다 이 바위의 종이 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는 현대에서 마르크스와 오펜하이머가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오늘날의 전설로 변모하여, 아직도 파괴적 힘을 행사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에피쿠로스가 추구했던 평정심과 반대로 단순히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심을 민중들에게 준 것은 분명히 반에피쿠로스적이다. 이런 모순적 결과를 그는 어떻게 설명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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