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뉴로그림 노운 Feb 28. 2023

빈 교실에 울려 퍼지는 라흐마니노프

독서대의 풍경



독서대에 관련한 일화는 한 친구의 새벽 세콤 사건이다. 야간 자습 이후 모두 기숙사로 우르르 넘어갔는데 엎드려 자고 있던 B군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고 깨우지 않았다. 새벽 1시가 넘어 독서대에서 잠이 깬 B군은 결국 세콤을 터트리고 말았다. 훗날 모임에서 자주 회자되던 사건이었다.






개인 독서대의 풍경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결벽증 수준의 정리벽이 있는 아이도 있었다. 언제나 질서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문제집도 색깔별로 혹은 주제별로 반듯하게 정리해 놓곤 했다. 독서대의 많은 수가, 정리가 잘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의 완벽주의적인 성향은 독서대 풍경에서도 잘 드러났다.


언제나 독서대 한 면이 다른 사람들로 바글대는 독서대도 있다. 인기 많은 아이들은 언제나 많은 아이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오는 아이들을 쉬이 내치지 못하고 심심하면 찾아오는 그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위치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독서대가 있는가 하면 (복도나 벽 쪽으로 위치한 독서대) 거의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기 어려운 독서대도 있었다. 위치에 따라 독서대 짝지, 독짝을 자처하며 서로의 잠을 깨우고 공부를 독려하는 등 정서적으로 지지가 되어주기도 하였다.





2학년 여름 경이었나. 어울리던 여자 아이들의 반이 나뉘었다. 학교에서는 수료생(카이스트)과 졸업생(일반대)을 분리하였고, 비수능이냐 수능이냐로 진로가 구분되어 공부를 나눠 하기 시작했다. 일반대 진로를 결정한 아이들은 수료생들과 헤어지면서 수능 디데이가 시작되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독서를 하고, 음악을 듣고, 계획을 세우고, 마음을 다잡았다.


갑갑한 독서실이 싫어질 때면 가끔 난 빈 교실로 갔다. 시디플레이어를 가지고 가서 좋아하는 곡을 크게 틀고 음악 감상을 했다. 주로 뉴에이지와 팝송, 클래식을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무한 반복하여 들었던 것이다. 자꾸자꾸 듣다 보면 감정이 휘몰아치는 구간이 생기는데 나 홀로 빈 교실에서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훔치곤 하였다.


돌아오면 독서대에는 쪽지가 놓여 있곤 했다. 어디 간 거냐, 뭐 빌려 간다, 들고 간다, 고맙다, 여기 앉아있으니 니 인기를 실감하겠다, 언제 오는 거냐 등등.


별 다른 꿈이 없던 나는 첫 입시에 실패했다.

아직도 라흐마니노프를 들으면 그때 생각이 난다.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이다.
앞에는 언덕이 있고 냇물이 있고 진흙도 있다.
걷기 좋은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먼 곳으로 항해하는 배가 풍파를 만나지 않고 조용히 갈 수는 없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차라리 고난 속에서 인생의 기쁨이 있다.
풍파 없는 항해란 얼마나 단조로운가!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뛴다.

-니체



https://youtu.be/pABcv_B8mJ8


이전 10화 마파두부가 싫어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