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동안일 수 있었는데
뇌경색으로 추적 관찰하며 투약 중인 80대 남자 환자가 있다. 나이가 많아 기대 여명이 길지 않기에 전립선암을 진단받을 당시에도 수술에 대한 별 생각이 없었다. 치료 의지도 없었고 그저 남은 날 살다 죽겠노라 했다. 기대 여명이 8년 이상 되는 암이고, 치료를 하든 안 하든 쉽게 죽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잘 배운 어르신이다. 한시 대회에 나가서 장원도 받고, 4년 동안 뇌경색 치료 잘해주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 도와줘서 항상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재진 환자의 평균 진료 시간 2분을 넘기고 항상 많은 말을 하시는 분이라 바쁜 외래 시간에는 가끔 바쁠 때는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사는 이야기, 70대가 되어서도 장원 급제 등의 이야기를 해주니 재밌기도 했다. 본인이 쓴 책을 보여주며 하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한시를 읽어주는데 뭔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흥이, 열정이, 나이 많은 노인도 이것저것 해낼 수 있다는 긍정의 아이콘 같아 보기 좋았다. 비뇨기과 기록에는 전립선암이 이미 뼈 전이까지 일으켜서 대학병원에서의 수술을 수차례 권고한 바 있었지만, 제법 건강하게 지내온 4년이 나에게도 참으로 고마웠다. 나 역시 내 환자가 건강히 잘 지내면 좋은 법이다. 가끔 듣는 보호자의 사망 소식이나 넘어져 골절이 되었다는 등의 소식에 나 역시 같이 절망스러울 때가 많으니.
잘 지내오던 4년 세월 이후 어느 날 너무 어지럽다고 내원하였다. 혹여 뇌전이일까 싶어서 부랴부랴 입원을 시켜 검사를 했더니 다행히 뇌전이는 아니었고 전정신경염이 왔던 것이었지만,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입원 검사에서 폐 전이가 의심되었던 것. 전정신경염은 그냥 귀 감기 정도로 설명하곤 한다. 귀 감기는 별 게 아니다. 일반 감기 일주일 가듯이 어지럼이 일주일 정도 통상 지속되다가 좋아지곤 하니까. 하지만 폐 전이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급성 폐렴만 와도 치사율이 확 치솟는다. 폐에 지속적으로 염증이나 부종 등이 생기면서 호흡 곤란, 전신 위약, 패혈증 등의 형태로 사망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지는 것이다.
뇌경색 이후로 열심히 관리해오던 건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며칠 사이에 급격히 노쇠한 듯하였고, 근 소실이 심해졌다. 환자가 자꾸 나빠지기만 하는 것을 보는 건 힘든 일이다. 더 해줄 것이 없을 때, 나 역시 같이 나락으로 빠지고 만다. 공감을 안 해 버리면 내가 덜 힘드니까 무덤덤한 내 성격이 이런 때는 도움이 되곤 했는데, 엄마가 되고 나서 공감 훈련을 강제로 하게 되서인지 좀 더 감성적으로 변하고 더 힘들어졌다.
치료제가 별로 없는 신경과의 질환들이 나에게 크나큰 무게로 다가올 때가 있다. 물론 이번 케이스는 신경과 질환과는 거리가 있지만 대부분의 우리 과 질환들이 좀 그렇다. 답 없는 경우가 많고, 조금씩 나빠지고, 약을 줘도 소용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일까, 신경과 의사들은 흰머리도 많고 노안이 많다. 소아과 선생님들은 주로 동안인 경우가 많고. 아이들은 대부분 회복력이 빠르다. 급격히 안 좋았던 환아도 급격히 좋아져서 일상 회복력이 엄청날 정도로 멀쩡 해지는 경우가 있고, 그래서 의사들은 희열도 느낄 것이다. 다 죽어가던 아이를 내가 살려냈다는 보람! 나는 다른 과를 했거나 다른 직업을 가졌더라면 더 동안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가끔 생각해본다. 신경과 의사를 해서 더 빨리 늙어버린 것이리라. 아 아깝다, 더 동안일 수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