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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숨 Feb 25. 2022

평범했던 그날, 환자가 되다

비자발적 딩크의 시작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돼지국밥이라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소개팅 '애프터' 장소를 충무로 뒷골목 돼지국밥집으로 정한 이유였다. 국밥이 나오자 그녀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휘휘 젓더니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았다. 새우젓 통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스푼으로 새우젓 한 스푼, 그리고 아직 입을 대지 않은 숟가락으로 소금을 살짝 떠서 자기 국밥에 넣었다. 그리고 슬며시 나를 쳐다봤다. "저도 그 조제법대로 해주세요" 왜 약사도 아닌 내가 '조제'라는 단어를 선택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수줍게 웃던 그녀는 무심하게 조금 전 행동을 그대로 반복했다. 내 국밥과 그녀의 국밥이 비로소 같아졌다. 소개팅 장소였던 파스타집에서보다 우리는 훨씬 많은 얘기를 했다.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또는 '인생이 원하는 대로 잘 흘러가고 있는지' 같은, 마치 오래된 친구와 나눌 법한 주제를, 겨우 두 번째 만난 남녀가 숟가락에 돼지국밥을 올려두고 호호 불어가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그 장면이 펼쳐졌다. 그녀가 갑자기 뚝배기를 두 손으로 잡더니 자신의 입 쪽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후루룩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킨 뒤에야 내 시선을 알아챘다. "아 이상해 보여요? 원래 전 이렇게 먹어요 흐흐" 화려한 외모와는 180도 다른 털털함, 돼지국밥과 닮은 담백함, 그리고 잘 무너져 내릴 것 같지 않은 단단함. 난 그 순간 결혼을 결심했다.


  우리 부부는 아기를 정말 좋아한다. 나는 조카를 너무 예뻐해서 한글도 모르는 애한테 '나중에 크면 보라'며 편지를 쓸 정도였고(이 편지를 읽은 뒤 형수님은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아내는 친구 A양 딸의 동영상을 '비디오테이프였다면 닳아 없어졌을 정도로' 보고 또 봤다. 하지만 신혼 1년은 온전히 둘만 보내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결혼 직후 공교롭게도 나와 아내 모두 회사가 바빠져 '2세' 생각할 겨를이 없기도 했다. 결혼 1주년 무렵인 2019년 가을 우리는 남프랑스로 여행을 떠났다. 생리주기상 '위험한 시기'였다. 나는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제는 생겨도 하늘의 뜻이지 뭐"라며 웃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우리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임을 하지 않으면 바로 아이가 생기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네" 아내가 말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석 달.. 어느새 6개월이 지났고 여전히 우리는 둘만의 신혼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아내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뭐하냐고 물으면 인터넷 카페에 볼 게 있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우리.. 병원 가볼까?" 



2019년 가을 프랑스 니스에서 찍은 사진. 이때만 해도 우리에겐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리고 그날. 특별할 것 없던 월요일 오후였다. 나는 야간 당직이라 저녁까지는 시간이 비었고, 아내는 오후 반차를 냈다. 지하주차장에서 병원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문득 '여성의원인데 남자가 들어가도 되는 건가'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병원은 한산했다. 상담실장님 말이 여성의원은 원래 아침 시간에 사람이 많다고 한다. 간단한 검사를 한 뒤 결과를 기다렸다. 진료실 앞에는 동영상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인공수정과 시험관 시술에 관한 영상이었다. 화면 대부분에 여성의 생식기가 등장했다. 옆에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분도 앉아 있던 상황이라 얼굴이 좀 화끈거렸다. '아 이런 걸 주로 하는 병원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우리는 임신 가능성이 높은 날짜 정도를 물어보러 온 거니까 사실 동영상 내용은 내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얼마 뒤 아내의 이름이 불렸고, 우리는 나란히 의사 선생님 앞에 앉았다. 결과지는 이미 출력돼 있었다. "두 분 다 상황이 안 좋네요. 아무래도 바로 시험관을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내는 그 짧은 순간 목이 잠겨있었다. "그렇게.. 안 좋나요?" 그때부터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용어로 가득 찬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됐다. AMH가 어떻고 활동성이 어떻고.. 문득 아내가 그토록 즐겨보던 카페가 이런 것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로써 하나는 확실해졌다. 우리가 남들과 달리 아이를 쉽게 가질 수 있는 부부는 아니라는 것.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내는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곧바로 시험관을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우리 부부의 많은 것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 병원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냥 아이를 기다리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30대 신혼부부였다. 그런데 갑자기 환자가 돼버리다니.. 순간 우리 결혼식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식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던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너희에게 하나만 당부한다. 우선 애부터 가져라." 시아버지의 짓궂은 축사에 하객들은 폭소를 터뜨렸고, 나와 아내는 머쓱한 웃음을 교환했다. 그때는 왜 저런 말씀을 하시나 아버지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는데, '아이는 늦게 가지더라도, 병원은 미리 가 볼 걸 그랬나' 하는 작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또 떠오른 건, '우리는 아이 안 갖기로 했어'라고 말하던 수많은 딩크(DINK) 선배들. '과연 모두 자발적 딩크였던 걸까?' 지금까지 나는 출산과 관련해선 세상에 두 부류만 있는 걸로 생각해왔다. 아이를 낳으려는 사람과 낳지 않으려는 사람. 그런데 세 번째 부류, 낳고 싶은데도 낳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 부부가 그 당사자가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우리는 손을 잡고 병원을 나섰다. 나는 회사로, 아내는 집으로 향했다.


얼마 후 울린 '카톡' 소리.



병원에 다녀온 그날 우리 카톡 대화.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게 재구성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했다.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시험관 시술만 하면 곧바로 아기가 생길 거라고. 가뜩이나 둘 다 운동을 못 해서 걱정이었는데, 이 핑계로 운동하게 됐으니 좋은 점도 있다고. 그때까지는 정말 이렇게만 생각했다.


우리는 미처 몰랐다. 우리 부부 인생의 새로운 장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또 난임 진단을 받기 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음을. 그리고 시험관 시술이 그리 쉬운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부부는 정말 미처 몰랐다.




<오늘도 아내를 바늘로 찔렀다(부제: 난임부부 생존기)첫 화부터 보기 https://brunch.co.kr/@a1f9702194b543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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