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숨 Feb 28. 2022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니까

삼신할머니께 밥을 차려드렸다

과연 다녀가셨을까?


  어느 가을날 아침, 아내는 졸린 눈을 비비며 말했다. "틀림없이 다녀가셨어. 간밤에 바람이 많이 불었어" 나는 이렇게 답했다. 바람과 함께 간밤에 다녀간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고? 그로부터 12시간 전, 우리는 동네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건어물 코너에 잠시 멈춘 아내. 갑자기 "기장 미역이 제일 좋은 거지?"라고 물었다. 나는 "완도 미역이 더 좋은 거 아냐?"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대화.


"근데 갑자기 웬 미역? 집에 남은 거 있잖아"

"다른 용도로 쓸 데가 있어"

"응?"

"삼신할머니 밥을 차려드리려고, 그렇게 하면 성공률이 높아진대"

"응? 그게 뭔데?"

"매달 음력 6일 흰 쌀과 미역을 창문에 올려두는 거야"


  삼신할머니라니. 내 귀를 의심했다. 아내는 원래 종교가 없었다. 신이 어디 있느냐며 차라리 자기 자신을 믿겠다던 '무신론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도 부처님도 아닌, 삼신할머니의 밥을 차려드리겠다니.(삼신할머니 무례함을 용서해주세요. 나쁜 뜻은 아닙니다.)


"이건 그야말로 미신이잖아"

"나도 난임 카페에서 처음 보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정말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려고.. 아.. 이 얘기하니까 또 눈물 날 것 같아"


  그날 잠들기 전 아내는 국그릇에는 '기장 미역'을, 밥그릇에는 햅쌀을 정성스럽게 담아 안방 창틀에 올려뒀다. 그리고 우리는 소리 내어 기도했다. "삼신할머니 건강한 아이를 점지해주세요." 그렇게 다음 날이 밝았고 아내는 눈을 뜨자마자 내게 '삼신할머니가 다녀갔을까?'라고 물은 것이다. 나의 대답을 들은 아내는 번쩍 몸을 일으키더니 주방에서 그릇을 하나 더 가져왔다. 이번엔 미역도, 쌀도 아닌 물이 담겨 있었다. "삼신할머니 맛있게 드셨습니까? 물도 드세요" 이 광경이 슬프기도, 귀엽기도 해서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아내는 부정 탄다며 사진도 못 찍게 했다. 삼신할머니는 우리의 지푸라기 3(삼)이었다.



우리의 첫 번째 지푸라기 배 워머

간절함의 다른 이름 '지푸라기'


  '지푸라기'는 난임 전투에서의 생존을 위한 우리만의 암호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는, '간절함'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성공보다 실패에 익숙해지던 어느 날 아내는 희한하게 생긴, 나는 생전 처음 본, 복대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게 뭐냐고 물었다. 아내는 "배 워머(warmer)야. 배가 따듯해져야 하거든."이라고 하더니, 손가락 한 개를 펴면서 "이게 지푸라기 1(일)이야"라고 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 시내에 있는 무슨 한의원에서 지은 한약이 지푸라기 2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얼마 뒤 세 번째 지푸라기, '삼신할머니 밥 차려드리기'에 나섰던 것이다. 우리의 지푸라기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늘어났고 때때로 그녀의 성격까지 바꿔놨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상품이 좀 늦게 와도 넉넉히 이해하던 사람이, 폭설 때문에 족욕기 배송이 며칠 늦어진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 새로운 차수(시험관 시술 주기)가 시작되니까 이번 주말부터 족욕기를 해보려고 했는데.."라며 아내는 못내 아쉬워했다.



작년 초 아내가 '120배'를 했던 석모도 눈썹바위

108배가 아니라 120배인 이유


  우리의 또 다른 지푸라기는 용하다는 전국 각지의 절이었다. 대구 팔공산 갓바위, 양양 낙산사는 연례행사처럼 방문했고, 어쩌다 새로운 지역에 놀러 가면 그곳에 있는 오래된 절부터 검색해봤다. 인왕산 선바위, 강릉 아들바위처럼, 절은 아니지만 유서 깊은 바위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올라가면 어김없이 108번 절을 했다.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108배(拜)를 하면 부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까 해서였다. '108배'하면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2021년의 첫 108배를 하기 위해 인천 강화군 석모도 보문사 눈썹바위에 갔을 때였다. 아내와 나는 분명 비슷한 속도로 절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108배를 마치고도 한참 동안이나 아내는 절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그 이유를 물었다. 아내는 이렇게 답했다. "120번쯤 절을 한 것 같아. 자꾸 숫자를 까먹어서, 찝찝하면 한 번씩 더 했거든. 잘못 세서 108번이 안 되면 안 되잖아." 나는 아내의 간절함에 또 한 번 놀랐다. 가슴이 깊은 곳에서 아려왔다.


오늘 행운을 다 쓰는 건 아니겠지?


  아내는 오죽하면 갑자기 찾아온 행운마저 불안해했다. 노약자나 기저 질환자가 아니면 백신을 구하기 힘들던 어느 날이었다. 며칠째 '광클'을 했는데도 실패만 거듭하던 아내로부터 "백신 성공!"이라는 카톡이 왔다. 전화를 여기저기 돌린 끝에 집 앞 병원에서 '지금 오면 맞을 수 있다'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 그냥 기뻐하면 될 것을, 아내가 그다음에 보낸 카톡은 이랬다. "오늘, 행운을 다 쓰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온갖 지푸라기를 동원해서라도, 지금 우리의 행운은 온전히, 단 한 곳에 쓰여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아내를 바늘로 찔렀다(부제: 난임부부 생존기)첫 화부터 보기 https://brunch.co.kr/@a1f9702194b543e/1

새 연재 <일상의 인상> 보기 https://brunch.co.kr/@a1f9702194b543e/17

이전 03화 파도 앞에서 모래성 쌓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