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시작된 시험관 시술. 모든 게 갑작스러웠지만 나를 가장 당황시켰던 건 '배 주사'였다. 환자가 아플 때 의료기관에서 의료인이 놓는 것. 이게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주사'의 정의였다. 그런데 여성의원 상담실장님의 말씀은 '우리 집'에서 '우리'가 직접 주사를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잘못해서 용량을 못 맞추면요?" "주사를 맞다가 갑자기 피가 나면요?" 나는 옆에서 연신 질문을 쏟아냈다. 알고 보니 시험관 시술은 그냥 '시술'이 아니었다. 보통 시술이라고 하면, 각종 미용 시술처럼 하루 또는 이틀 병원의 처치를 받는 것을 떠올리는데, 시험관 시술은 거의 한 달을 꼬박 매달려야 하는 대장정이었다. 우리가 배 주사를 병원이 아닌 집에서 맞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직장인이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병원에 와서 주사를 맞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우리 냉장고에는 알코올 솜이 쌓여갔다
주사의 종류도 다양했다. 난자 채취 전에는 며칠간 과배란 주사를 맞고, 채취 전날에는 난포가 터지는 주사까지 맞아야 한다. 수정된 배아를 이식한 후에도 (사람에 따라) 또 주사가 기다리고 있다. 어떤 건 냉장보관, 어떤 건 상온 보관, 어떤 건 매일 맞고, 어떤 건 한 번만 맞고, 어떤 건 아프고, 어떤 건 더 아프다. 아내는 이런 내용이 빼곡하게 적힌 빳빳한 종이를 반으로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주사액과 주사기가 가득 담긴 작은 아이스박스는 내가 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 번째 시험관 시술이 시작되고 있었다. 배 주사를 처음 놓던 날, 우리는 병원에서 소개해 준 동영상을 함께 시청했다. 어떤 서양 여성이 왼손 엄지와 검지로 자기 배를 꼬집는 것처럼 잡더니 그 사이 튀어나온 배 가죽 부분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순식간이었다. "배꼽에서 대각선 아래로 두 마디니까 그럼 여기쯤?" 내가 사람 몸에 주사를 놓아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서러웠다. 누구나 겪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힘들었다. 시험을 망친 사람에게 가장 힘이 되는 조언은 "힘내"가 아니라 "나도 망쳤어" 아니던가.
'누구나 겪는 일이 아니라는 점' 난임 부부들이 힘든 이유다
그리고 첫 채취일. 아내의 이름이 불리기 직전까지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잘하고 올게" 금방 끝난다고는 하지만, 인위적으로 난자를 끄집어낸다는 게 몸에 좋을 턱이 없다. 그 고통 속으로 아내가 성큼성큼 들어가고 있다. 가슴이 아려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번엔 간호사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 정확히는 내 이름이 아니라 '(아내 이름)님 배우자분'이다. 정차 채취 과정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플라스틱 통을 받은 뒤 별도의 공간(비밀의 방)에 들어갔다가 통은 안에 두고 빈 손으로 나오는 과정 말이다. 그러나 남편들은 누구 하나 머쓱해하지 않는다. 자신이 정자 채취 때 잠깐 느낄 그 당혹감을 아내는 매일매일 시시각각 느끼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시간쯤 지나 힘없이 걸어 나온 아내는 눈가가 촉촉해 있었다. 왠지 모를 서글픔에 수면 마취 직전 또 눈물이 났다고 했다. 수정된 배아는 딱 1개. 며칠 후 이식까지 했지만 피검사 수치는 0이었다. 비임신. 실패다. 그렇게 2020년 모두 3차례 채취와 이식을 시도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비자발적 딩크 부부'의 삶이 이어졌다.
파도는 모래성을 한 순간에 쓰러뜨린다
어느 순간 우리가 모래성을 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래로 아무리 멋진 성을 만들어도 파도가 한번 다가오면 사라진다.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시험관 1, 2, 3차 모두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주사도, 약도 빼먹지 않았고, 건강을 위해 집 앞 공원을 뛰었다. 그런데도, 채취나 이식 결과가 좋지 않으면 다시 시작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약도 다시 먹고, 주사도 다시 맞고, 처음부터, 다시 지난한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의지에 불탄다고 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채취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성의 몸은 신비해서 한 달에 한 번만 난자를 배출한다. 한시가 급한 난임 부부라고 예외가 아니다. 하늘은 이럴 땐 참 지독하게 공평하다. 그렇다고 매달 채취를 했다가는 몸이 버텨내지를 못한다.
오빠 나 자꾸 눈물이 나. 나도 모르겠어 왜 이러는지..
모래성이 쓰러질 때면 우리 부부도 휘청거렸다. 아내는 눈물이 많아졌다. 원래도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달라진 점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날마다 찔러대는 주삿바늘에 호르몬이 춤을 추기 때문이리라.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다가도, 아무렇지도 않게 장모님과 통화하다가도, 아내는 갑자기 눈물을 쏟아냈다. 나 역시 하루하루 커지는 우울감에 시달렸다. 나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을 처음 맞닥뜨렸다는 무력감이 컸다. 하지만, 그 무력감보다 몇 배 괴로웠던 건, 겨우 두 번째 만남에서 돼지국밥을 그릇째 들고 먹던 그 단단하던 나의 여인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걸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 사이 2020년은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모래성을 쌓고 있었다. 저 멀리 파도의 환영이 아른거리지만 우리는 우리를 반씩 닮은 아이를 기다리며 계속 모래성을 쌓아 올리기로 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모래성이라도, 우리 둘이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