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간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그들의 시간과 공간이 일치하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50년이 걸렸다. 식성이나 취미 같은 것이 같다고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어렵다. 부모가 같다거나 학교가 같아서도 사람들 간의 관계가 형성되지도 않는다. 본인들의 시간과 공간을 온전히 내어주는 용기와 정성이 없다면 다른 것들의 공통분모가 아무리 많아도 절대로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그렇게 본인의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었다면 진정한 친구관계가 형성이 되는 걸까. 그것도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늘 조심스러웠던 나의 성격을 감안하자면 몇 안 되는 친구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고마운 조건이란 건 바로 시간과 공간을 오롯이 내어주어야만 가능하다는 결론이 생긴다. 나의 10대는 물정 모르게 흘러버린 시간이었고 나의 20대는 나 스스로 주도해서 시간을 늘렸다 줄였다가 가능한 시기였다. 또 나의 30대는 세상과의 단절을 꾀하기에 바쁜 시기였다면 나의 40대는 세상과 나의 관계를 일정 부분 인정해 가는 시기였다. 이제 50대에 접어든 나의 인생은 진실과 사실의 차이를 깨달아가는 시간으로 접어든 듯하다.
수영의 장례식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KTX나 새마을호가 많이 있었지만 난 무궁화호를 골랐다.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금강, 무궁화호조차 서지 않는 시골 간이역, 작년 가을 수확한 배나무에 아직도 달려 있는 배 봉지, 그 모든 풍경들이 고즈넉해 보여서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나의 눈으로 들어와서 가슴속으로 위안을 안겨주었다. 시속 120KM의 속도로 나는 수영에게 가고 있다. 조금 천천히 달려가면 마음의 준비가 될 것 같았다. 친구의 죽음이 떠오르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다니고 고등학교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친해져서 같은 반이 아니었음에도 쉬는 시간마다 만나서 수다를 떨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친구, 수영.
수영이 죽었다.
누가 먼저 다가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고등학교 내내 붙어 다녔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해서도 제일 친한 친구관계였다.
결혼을 한 여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전화 통화만으로 안부를 전하고 20년 가까이 얼굴 한번 보지 않았어도 언제나 내 곁에 있는 것 같은 그런 존재로 관계를 유지해 가는 베스트 프렌드. 그런데 그런 수영이 죽었다고 연락이 왔다.
난 무궁화호를 천천히 타고 가면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고 사실 그러한 작업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이내 깨달았다.
전화통화를 계속해 왔지만 못 만난 지는 20년이 넘었고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기엔 아직 나는 젊고, 또 바깥 풍경은 너무 편안했다. 난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상상인지 더듬거리기 시작했고 기차 밖의 풍경을 보는 것으로 현실을 벗어나려 애쓰기만 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하기만 할 뿐 생각은 정리가 되지 않았고 수영과 같이 보냈던 시간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은 영원히 가능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친구 수영이 죽었다는 것을 어찌 인정한다는 말인가. 그저 기차 창을 스치는 풍경으로 겨울이 끝나는 가는 것을 가늠하며 발바닥 아래부터 올라오려는 슬픔을 가만히 내리눌러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 때때로 전화하면 어제 만났던 것처럼 대꾸를 해주고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내어주던 친구가 바로 수영이었다. 수영은 나에게 아낌없이 시간을 내어주고 친구라는 관계를 만들어가는데 강약 조절 없이 다가오던 그런 친구였다. 같은 시간 속에서 서로 다른 공간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관계가 유지되었던 진짜 친구.
2주 전에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다는 전화를 했다.
수영은 대학을 가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아들이 내심 대학을 가길 바랐다. 본인이 대학을 가지 않았기에 어쩌면 아들은 다른 길을 가길 바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통화 끝에 아들의 생각을 존중해주라는 하찮은 말을 한 듯하다. 대신 가 줄 수는 없으니 본인이 굳이 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억지로 밀어 부 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냐고, 가볍게 얘길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 수영의 목소리엔 건강한 웃음도 묻어났고 고등학교 시절 수다 떨던 소녀의 그것도 새어 나왔다. 그 어디에도 죽음의 냄새는 없었고 연약함도 없었다.
나는 그런 수영이 좋았고 또 믿음직했다. 언제나 씩씩하고 강한 아이, 수영
이제 쉰의 나이에 수영은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평소처럼 전화나 한통 하지. 전화 한 통도 없이 그리 떠나다니, 친구가 죽었다는 슬픔보다 나에게 전화하지 않은 서운함이 앞선다.
나는 부산에서 대전으로 전학을 가서 아무리 애써도 고쳐지지 않는 사투리가 말 끝에 남아 있었고 경상도 사람 특유의 성격도 고쳐지지 않았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맛있는 것을 맛있다고, 좋은 것을 좋다고 말을 하지 않는 대전 사람들과는 본질적인 괴리감이 존재했다. 대전 사람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그들의 무리에 끼어서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던 나의 어린 시절에 수영은 나의 언어를 이해했고 나는 수영의 언어를 이해하는 존재 들이었다. 속마음을 감추지 않고 맛있으면 맛있다고 말하던 수영, 어쩌면 그래서 수영과 내가 친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좋으면 좋다고, 같은 언어로 수다를 떨던 친구.
각자의 부모들에 대해서 공통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언제나 취해 있었고 그런 아버지에게 언제나 화가 나 있는 어머니, 또 그런 부모의 눈치를 봐야 했던 수영. 남편에 대한 불만은 자식에게로 돌아와 온전히 상처로 꽂아주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안쓰러워했지만 좋아할 순 없다고 했다. 등지고 살 수도 없다고 했다. 부모 자식의 관계란 참으로 지독하기 때문이다. 김장을 하거나 집안의 대소사가 있으면 그녀의 어머니는 수영에게 모든 걸 맡겼지만 신도시가 들어선 토지의 보상금은 수영의 오빠에게로 전부 갔다. 수영은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달관한 듯 얘기하지만 그 한 편에는 왜 서운함이 없었을까. 수영의 부모는 아들에게만은 절절맸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만은 냉담했다. 조건 없이 한없이 받았어야 하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그 마음은 다 어디다 두고 세상에 씩씩하게 살아가는지, 나는 씩씩한 수영을 볼 때마다 그의 그런 모습이 당연하면서도 존경스러웠다. 사랑받는 딸로 자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그 삶에 대한 아쉬움이 수영이나 나에겐 언제나 존재했다.
대체적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란 어찌해야 한다는 관념들이 우리들의 발목을 잡았고 스스로의 삶을 곰팡이처럼 잠식당하고 있었다.
“자식은 무조건 부모를 공경하라고 배웠잖아? 근데 그건 부모에게 사랑을 받았을 때 나 가능한 얘기 아니야?” 수영은 전화기 넘어 한숨과 분노가 섞인 어조로 말을 했고 나 또한 그 말에 그리 토를 달 수 없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만 우리 부모들 세대는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화가 나 있는 자신의 감정을 자식에게 배설하는 데도 현실을 보지 못했고 나아가서는 부모는 당연히 자식에게 새치 혀를 휘둘러도 되는 줄 알았다. 부모가 되는 법을 우리의 부모들도 배우지 못하고 부모가 되었고 부부가 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부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언어폭력은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헤쳤고 물리적인 폭력 또한 조절 없이 펼쳐도 되는 줄 알았다. 다만 그들 또한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 부모들을 이해하기까지 우리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 많은 시간 동안 부모와 자식 사이는 가까워질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을까.
수영과 나는 그러한 부모를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그런 공통분모가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아들들은 다들 내보내야 해.” 수영의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집에서 지냈고 겨드랑이에 털이 난 아들과 같은 집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늘 얘기했다. 자신의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를 자식에게 되돌려 주지 않기 위해 부던하게도 애를 써야 하는 그 일들이 한심스럽다고도 얘기했다. 햇살 같은 온전한 사랑을 한 번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자신의 자식에게 어떤 일이 가능한지 어떤 말들이 가능한지 스스로 조절하는 게 어렵기도 할 것이다. 빠르게 변해 가는 세상에 적응하기도 어려워지는 오십이라는 나이에 세상을 살아내야 하고 자식을 키워내야 하고 남편의 감정도 살펴야 하고 또 돈 버는 중요한 일도 해 내야만 하니 그 모든 과정들이 또한 버겁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 보태져서 좋아할 수 없는 부모에게도 자식 노릇을 해야 한다. 그 모든 노릇들이 당연하게 내 곁에 있지만 어느 순간 벅차게 힘들다는 생각이 차오르기 시작한다면 어찌해야 할까.
육십까지만 살면 좋겠다는 내 말에는 언제나 수영은 나를 나무랐다. 이제 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게 되었는데 그 나이는 너무 이르다고. 누군가 처음부터 세상사는 법을 알려주면 좋겠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알아간다는 것과 알게 되었다는 의미를 정확히 구분해서 나에게 얘길 했다.
사는 것은 얼마나 잘 적응을 할 수 있느냐의 게임이다.
살아가는 힘과 살아갈 수 있다는 힘은 확연히 다르다. 세상을 사는 법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과 천천히 배워가는 사람은 언제나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언제나 사는 게 힘들었고 매 순간이 두려웠다. 그 불안함을 드러나지 않기 위해 힘주어 사느라 세상이 싫었고 매 순간 비틀거리는 내 자신이 싫었다. 수영은 그런 나에게 “사는 게 원래 그래, 너무 애쓰지 마.”라고 말을 했고 나는 그 말뜻을 한 번도 제대로 이해를 못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면서 수영과 난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는 해에 수영에게서 연락이 왔다. 뜻밖에 수영은 남자 친구를 소개했고 그 해에 그 남자 친구와 결혼을 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이었지만 난 수영의 결혼을 의심하지 않았다. 비교적 빠른 결혼이었지만 첫사랑의 결실이라고 생각했다. 용기가 대단하다고 말을 했고 그 말에 수영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수영의 첫 아이가 사산되고 나서야 난 수영의 결혼이 단순한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다녔던 직장의 대표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임신이 되는 바람에 결혼까지 이어진 것이라는 수영의 담담한 표현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세상은 수영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지만 수영은 세상에서 버티는 법을 일찍 깨달았고 담담히 적응하는 방법도 그 익힘이 빨랐다.
성폭행을 당해서 생긴 아이이지만 잘 키워 보려고 했다고 했다. 하지만 수시로 마음에 피어 나는 미움이 더 컸나 보다고, 그래서 약하디 약한 아이가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 같다고 했다. 사산 후 병원에 누워서 뱉어내는 수영의 언어에는 분노도 없었고 서러움도 없었다. 나는 아이가 좋은 곳으로 갔을 거라는 상투적인 말밖엔 할 말이 없었지만 수영은 이미 그 모든 것들이 지나고 평온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내가 수영을 마지막으로 마주한 얼굴이었다.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그 나이에 알지 못했지만 수영은 어린 나이에도 이미 혼란을 맞닥뜨리고 그 혼란들을 분류해서 정리하는 법을 알았던 것 같다. 살다 보면 정리가 안 된 혼란들이 끊임없이 다가온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내게는 정리가 안되고 무심히 다가오던 비틀거림도 수영에게로 가면 가벼우면서도 간결한 무언가로 변해버리는 그 능력이 언제나 부러웠다. 나는 모르고 수영은 알고 있었던 세상이 이제는 감당이 안되었던 것일까. 아낌없이 관계를 만들어주던 너는 어째서 다른 세상을 택한 걸까
현수에게 걸려온 전화를 거절로 바꾸고 메시지를 넣었다
「기차 안이라 전화받기가 좀 그래.」
「응, 언제 도착해? 난 도착했어.」
「1시간 좀 더 남았어.」
메시지를 보내고 현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현수의 얼굴이 희미하다. 까맣고 동그란 현수의 눈만 떠오른다. 수영과 현수는 나와 같이 고등학교 친한 친구였다.
「이게 무슨 일이니?」
감정이 휘몰아친다. 현수의 착한 얼굴이 조금씩 그려진다.
「수업이 있었을 텐데 일찍 도착했네? 혼자 왔어?」
「응, 운전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들었어?」
「아들내미랑 큰소리치고 싸우고 아들이 잠깐 밖에 나갔는데 그 사이에 쓰러졌대. 집에 아무도 없어서 심장마비 같다고.」
「현수야, 나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거지?」
「당연하지. 나 혼자는 못 들어가겠어.」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줘.」
학교 다닐 때도 항상 어른스러웠던 아이였다.
현수의 단정한 맵시는 가정의 평안에서 오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수영과 좀 더 친구사이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현수의 배려도 있었으리라.
수영과 현수는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수영은 현수보다는 오히려 나와 더 친하게 지냈다.
서로의 아픈 부분을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사이라서 더 그러했는지도 모르겠다. 현수가 내뿜는 말간 에너지가 나와 수영에게는 감당이 안 되었으리라.
학교에서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도서관이 있었고 우리는 둘이나 셋이서 종종 도서관에 가는 걸 좋아했다. 특히나 봄에는 뚝길에 심어 놓은 벚꽃들이 소녀들의 가슴을 종종거리게 하기에 좋았다. 벚꽃이 지면 연이어 피는 개나리 또한 사춘기 소녀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충전제였다. 도서관을 가기 위함이 아니라 그 뚝길을 걷기 위해 도서관에 가곤 했고 가다 중간에 길 위에 눌러앉아서 하모니카를 불어 주던 수영이 아직도 내 기억엔 절절하다.
수영은 하모니카를 아주 멋지게 불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김광석의 먼지가 되어, 푸른하늘의 눈물 나는 날에는 같은 노래들을 우리에게 들려주던 그 어여쁜 모습들이 파편처럼 남아 있다. 성인이 되고서는 아직도 하모니카를 부는지 물어본 적이 없는데 불현듯 수영이 뚝길에서 불어주던 하모니카 소리가 떠오른다.
우리의 소녀시절은 왜 그렇게 빨리 지나갔는지 누구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까.
어쩌다 이렇게 중년의 길 위에 서 있게 된 걸까. 너는 어쩌다 그 길에서 내려간 걸까.
세상이 우리에게 좀 더 친절했다면 어땠을까.
수영과 내가 아직도 이 길 위에 서 있었을까
대구역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나온다.
사람들이 절반 가까이 내리고 또 절반 가까이 채워진다. 다들 어디를 가고 있는 것일까. 나처럼 친구의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이도 있을까.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정들이 기차 내부에 가득 채워져서 어떤 색이 만들어졌을까. 난 죽음의 색을 표현하라면 크림색이라고 말하고 싶다. 껍데기를 벗어 놓고 훨훨 자유로워지려면 색이라도 밝았으면 좋겠다. 내 친구의 죽음이 회색이나 검은색이 아닌 크림색이라면 내 마음이 좀 더 편안한 걸까. 잔잔한 봄이 다가올 것 같은 이런 날에 넌 죽음을 선택했구나. 가벼워지려고 그랬나 보구나. 너의 죽음이 너에게 좋은 선택이 되길 난 온전히 바랄 뿐이야. 그런 마음을 먹기 위해 난 기차를 타고 가고 있어. 너에게 가고 있어. 이 세상에 와서 겪었던 수많은 힘든 일들이 다음 생에는 사라져 주길 그저 바랄 뿐이야. 대구를 출발한다는 방송이 나오네. 이제 너에게 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 좀 더 시간이 남아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거야. 너를 마주할 수 있을 거야. 부산으로 가는 무궁화 기차는 참으로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