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기관을 이모가 교사로 있는 곳으로 옮기고 이전 기관에선 미처 알지 못했던 아이의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전 원에서는 그저 좀 아기가 같은 면모가 다분한 아이 었을 뿐이었는데, 그것은 선생님들께서 아이의 상태에 대해 굳이 일을 만들고 싶지 않기도 선택했던 비즈니스적 발언일 뿐이었다.
아이가 그자 '아기 같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아이가 또래관계에 미숙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동으로 자라 어른들 사이에서 배려받고 어른들 속에서 으레 어린이라고 양보받은 행동들을 또래들에게도 당연히 자신이 받아야 하는 권리인 양 행동하고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방법을 몰랐다. 이전 원에서 왜 그 여자아이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을 때 왜 더 다른 친구와 놀지 못했는지 왜 그 자리에 멈춰 기다리기만 했어야 했는지 기관을 옮기고 나서야 알았다.
동생의 빠른 피드백은 너무 고마웠다. 하지만 반면에 너무 아팠다.
엄마로서 적당히 걸러 듣고 싶은 내 아이의 사회생활이 있기 마련인데, 아이의 자그마한 실수하나에도 빠른 피드백과 질책이 쏟아졌다. 동생은 사랑하는 자신의 조카를 위한 선택이었고 그걸 알면서도 나는 매일 같이 마음에 비수가 꽂혀 휘청거렸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아이 때문에 마음에 생채기가 조금씩 쌓이던 어느 날.
갑자기 ADHD라니!
내가 음악치료사로서 일을 했고 지금도 현역에 종사하는 선생님들과 아직도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내 아이가?
설마 하는 마음을 가지고 동생과 이야기를 더 나누었고 동생이 그간 교사와 이모의 입장으로 냉정히 관찰한 결과 지나친 과잉행동까진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선을 넘나드는 과잉행동과 주의력 결핍이 엿보인다고 했다.
예를 들면 월요일, 주말을 지낸 아이들이 모여 주말 지낸 이야기를 할 때 아이가 자신의 이야기는 신명 나게 말하고 다른 아이들이 말할 때는 누워있거나 딴청을 부리거나 갑자기 "얘들아 그거 알아!" 하면서 시선을 자기 쪽으로 분산시키는 행동은 매주 있는 일어있고, 그 좋아하는 책을 읽을 때에도 얼른 읽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자기가 읽고 싶은 모양새로 얼렁뚱땅 읽어내고, 주의 집중을 아예 못하는 게 아니지만 깨나 산만하여 그 자리에 온전히 못 있는 모습이 자꾸 보인다는 것 등등이었다.
내가 현역에서 일할 때 가장 답답했던 엄마의 모습이 내 아이의 상태를 인정하지 못하는 엄마들의 모습이었다. 그 시절 나는 미혼이었고 아이를 키워본 경험조차 없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육아를 하며 엄마의 마음도 모르는데 엄마들에게 교과서적인 이론을 들이밀며 이해와 인정을 조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내가 인정해야 하는 엄마가 돼야 하는 순간이 왔다. 동생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그저 내 아이를 속단할 것인지 정확한 검사를 받아 아이의 상태를 객관화해서 알 것 인지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병원을 간다는 것. 검사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내겐 '인정'의 과정이었기에 더더욱이 마음의 어려웠다.
고민을 하고 있는 그 상황에서도 동생의 피드백은 매일같이 이어졌다.
'그래, 나의 고민은 어쩌면 아이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마음을 다잡고 병원을 알아보다 우리 지역의 유명한 시립병원에 가까스로 빈자리 하나를 잡았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풀배터리 진행 일정을 잡았다. 원래대로라면 진료 후 3개월이나 지나야 검사가 가능했는데 운이 좋게도 중간에 한자리가 비어 한 달이 채 되지 않고 검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검사는 총 3-4시간이었다. 아이는 중간에 화장실을 간다고 검사실 밖을 나온 것을 제하고는 단 한 번도 검사실을 이탈하지 않고 검사를 충실히 잘 받았다. 아이가 검사하는 동안 대기실 앞에서 꼬박 책을 읽으며 아이를 기다리는데 한자리에서 온전히 저리도 검사를 잘 받는 아이가 과연 과잉행동 주의력 결핍장애가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내가 내 아이를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란 생각에 마음을 다시 접고, 생각을 정리했다.
일주일 즈음 지난 후 병원에 검사 결과지를 들으러 내원했다.
아이의 주의력 부족의 이유는 높은 지능에 있었다는 의외의 답을 들었다. 아이는 또래의 아이들의 범주보다 50점 이상의 점수가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어 또래의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가 생각보다 재미없고 지루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어린이가 할 수 있는 산만한 행동들이 튀어나온다는 그런 답변이 돌아왔다.
ADHD가 아니라는 생각에 너무 안도했지만 반면에 그러면 나는 이 아이를 어떤 방향을 가지고 키워야 하는가에 대한 큰 고민이 들기 시작했고 매일 아침마다 아이와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을 했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꼭 듣고 엄마가 오늘 하원하면 반 친구들 중에 무작위로 2명이 무슨 이야기했는지 물어볼 거야, 그러려면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잘 들어야 해. 우리 아가 할 수 있지? 이따가 엄마 만나면 즐겁게 설명해줘 꼭!"
원에 있는 동생과 함께 아이의 상태를 알았으니 아이에 맞게 우리는 손발을 맞추며 아이의 부족한 부분을 케어하고 학교에 가서는 문제가 되지 않게 하자며 아이를 단속했다. 아이도 엄마와 이모선생님의 마음을 아는지 곧잘 따라와 주고 그런 시늉도 열심히 했다. 그리고 기관을 졸업할 때 아이는 처음보다 정말 많이 좋아졌다.
아마도, 기관을 옮기지 않았더라면, 내 동생이 담임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 문제를 학교에 가서 1학년 때 알게 되고 이 상황에 대한 유연한 대처를 못했을 텐데, 다행히도 내게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동생이라서 그 과정에 아프고 속상하기도 하고 서로 마음도 상하긴 했지만 가장 빠른 방법으로 최선의 선택은 한 것 아닐까란 생각이 늘 든다. 모두가 기관과 집에서 고생했던 동생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