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보면 기억도 가물하지만 당시엔 간절했다
나이가 있기에 결혼하고 바로 아기가 생기기를 바랐다. 그런데 첫째를 만나기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다. 또, 그 시간이 참 힘들었다. 초조하고 기다리고 불안함의 연속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기억을 끄집어내야 할 만큼 가물가물해졌지만 그때는 임신이 성공하고 아니고 가 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 같았다. 또 임신이 되지 않으니 자존감도 상당히 낮아졌었다. 대학입시도 그렇지만 간절히 원하던 것을 얻고 얻지 못하고 가 당시에는 내 인생의 전부라 여겨지고 그걸 이루지 못했을 때 세상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이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어쨌든 그 힘든 시간들은 잊히고 또 다른 희로애락이 찾아오며 우리의 인생의 순간들을 맞이하는 것 같다.
결혼하고 얼마 후 테스트기에서 두 줄을 확인했었다. 그런데 안정적이지 않았는지 계속 하혈을 했고 의사는 누워있어야만 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방과 후교사를 하던 것을 그만두고 집에서 누워만 지냈다. 하지만 결국 화학적 유산이 되고 말았다. 또 시간이 지나고 두 번째 임신이 되었다. 심장소리를 들으러 갔는데 심장이 안 보인다고 했다. 심장소리를 들으러 설레며 갔던 남편과 나는 계류유산 수술 날짜를 잡고 와야 했다. 수술하려고 누워있던 나를 보고 남편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게 기억에 남는다. 처음 보는 남편의 눈물이었다. 지나고 들어보니 내가 안쓰러웠다고 한다. 수술 후 얼마 지나 아랫배가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니 남은 잔여물들이 나왔다. 계류유산하면 남편의 눈물과 마지막 그 고통이 잊히지 않는다.
임신을 기다리던 우리는 인공수정을 해 보기로 했다. 다니던 산부인과에 난임센터가 함께 있어 처음에는 거기서 진행했다. 주말에도 가서 배에 주사 맞았던 생각이 난다. 난자가 1개 생겼다는데도 해 보자고 해서 부담 없이 했는데 역시 임신에 실패였다. 진행해 보니 전문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아 근처에 있던 난임전문병원으로 옮겼다. 거기서는 시작부터 체계적이었다. 우선 산전검사부터 진행했다. 다른 건 되는데 나팔관조영술은 다른 병원에서 받아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이것이 또 나에게 정말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나팔관으로 잘 이동할 수 있는지 약물을 넣어 확인하는 것인데 정말 상상초월하는 것으로 아팠다. 병원에서 나오는데 너무 아프고 수치스러워 우울감이 확 몰려왔다. 당시 아파트 15층에 살았었는데 갑자기 여기서 뛰어내릴까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울증이 심하게 왔었지 않았을까 한다. 남편이 전화 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걱정해 주니 살 것 같았다.
난임전문병원에서 인공수정 첫 도전에 성공을 했다. 친정엄마에게 임신했다고 말하니 엄마가 수화기너머로 엄마 너무 좋다며 우셨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난다. 옆에서 맘 졸이고 고민했던 딸이 안쓰러우셨던 거다. 당시에 착상에 좋다는 영양제를 열심히 챙겨 먹었었다. 또 인터넷에서 검색하며 착상에 도움이 된다는 추어탕을 심장소리를 듣기 전까지 많이도 먹었다. 추어탕이란 걸 먹어본 적이 없는데 아이가 착상 잘 된다고 먹은 나도 신기하다. 지금도 추어탕만 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심장소리도 친정엄마와 함께 들으러 갔다. 대기하고 있는데 또 심장소리를 못 들으면 어쩌나 얼마나 떨리고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심장소리를 듣고 나서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결혼하는 연령이 높아지면서 요즘도 주변에는 임신을 기다리시는 분들을 많이 본다. 그럼 내가 겪었던 일들이 떠오르며 모두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시험관이나 더 한 고통을 겪으셨던 분들에 비하면 약할지 모르나 임신을 기다리고 마음 졸였던 순간들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지금은 아이 키우느라 매일 현실에 살고 그때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지지만 가끔 아이로 인해 속상할 때, 몸이 지칠 때 얼마나 소중한 아이를 얻었었는지 떠올린다. 이 아이를 만나기까지 얼마나 기다리고 마음 졸이고 감사했었는지 말이다. 그러한 순간들이 있기에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고 가족의 돈독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