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못 하면 좀 어때. 건강하기만 하면 됐지.
저번에 글을 쓰다가, 나의 자식 삼둥이들을 생각하며 그런 문장을 쓰려고 했다. 삼둥이는 모든 분야에서 빠릿한 편이 아닌데 공부 역시 그 분야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른둥이로 태어난 그들이 공부를 좀 못 하면 어떤가. 건강하기만 하면 됐지. 그러니까 내가 쓰려던 문장은 그거다. 공부 못 하면 좀 어때. 건강하기만 하면 됐지.
그런데 그 문장을 쓰려다가 갑자기 마음이 좀 켕겼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 싶은 내 글이지만, 누군가 내 글을 봤다, 그런데 그 글을 읽은 사람의 아이가 건강하지 않다면, 어쩌면 저 문장은 속상하고 슬픈 문장이지 않을까. 건강하기면 하면 됐지에서 건강하지 못 하다면 그럼 되지 않은 것인가.
이 이야길 친한 동생에게 했더니, 언니는 그럼 한 문장도 못 쓸 거라고, 그런 거까지 생각하면 글을 쓰기 힘들 거라고. 인기 있는 글들은 어느 정도 관종끼가 있어야 하는데 저런 거까지 생각하면 관종끼 있는 글은 쓸 수 없다고. 맞아, 맞아, 그 말도 맞아.
나는 뭐 그런 사람인 거다. 친한 동생의 말대로 인기 있는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리고 상처를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닌 문장에서도 상처를 줄 부분을 찾는 좀 소심한 사람인 것이다.
세 명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크고 있음이 결코 내가 쌓아 온 인생의 덕 때문이 아님을 알고 있어. 나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되는 부분이 아니라 나에게 찾아온 다행스럽고 감사해야 할 행운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또 문장 하나하나를 쓸 때마다 타인을 걱정하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나는 28주에 태어난 우리 아이들 중에 누구라도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라는 마음을 허방 어딘가에 두고 늘 생각하던 사람이라, 저 문장이 밟혔을 것이다.
어쩌면 글을 쓰면서 점점 쓸 수 있는 문장보다 쓸 수 없는 문장이 많아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글을 쓰면서 내 마음 속 어딘가를 등불을 들어 볼 수 있다면 그거 자체로 내 자신에게는 의미가 있겠지. 그게 내가 글을 쓰는 많은 이유와 목적 중 하나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