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인생 프로들이니까
주말 아침 딸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뭐든지 미리 계획을 세워 계획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플랜 맨(Plan man)’ 남편이 본인 플랜대로 우유와 과일, 떡을 챙겨 아침식사를 하려는 소리다. 나는 평소에 아침 식사를 하지 않기도 하고, 늦게 자는게 버릇이 되었기에 남편의 플랜에 맞춰 일어나는게 좀 힘들다. 신혼 2년 정도까지는 내려앉는 눈꺼풀을 잡아당기며 일어나 오로지 남편을 위한 아침 식사를 준비해 줬지만 어느 순간 슬그머니 피곤이나 숙취를 핑계로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2년 가까이 해줬으니 기본은 한게 아닐까 자기 합리화를 시켜본다.
나이 들어 결혼해보니 괜히 서로 눈치 보고, 하기 싫은 것 굳이 안 해도 되어서 좋다. 남편에게도 그렇고 시댁 식구들에게도 그렇다.
먼저 남편과의 관계에 있어, 주말부부인 우리는 적당히 붙어있고, 적당히 떨어져서 지내다 보니 결혼생활이 연착륙도 되고, 사실 결혼생활의 피로도가 적다. 짧지 않은 세월 각자의 삶에서 굳어진 습성은 바뀔 수 있는 게 아니므로 되도록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그냥 외워버리도록’ 노력한다. 이게 어려울 것 같지만 해보면 또 된다. 그동안 먹은 나이 갯수가 있지 않은가? 사람을 이해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외워버리는 것!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기에 괜한 잔소리는 피차 하지 않는다. 서로 피곤할 일을 만들지 않고 사는 지혜가 생긴 것은 나이가 준 선물이다.
물론 개인의 성격이나 환경, 교육 수준에 따라 결과에 있어 개인차가 있을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그 개인의 청춘시절 과거와 지금의 자신을 비교할 때 확실히 지혜로워진다. 보통 나이라는 것은 살아온 세월의 질량을 합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통찰이라는 능력이 나이와 함께 부쩍 성장한다. 그래서 눈치가 빤해지고 괜한 자존심을 부려 결국 나만 손해볼 짓을 하지 않게 된다.
이젠 거의 조선시대 즈음으로 기억되는, 오래전 내 20대 연애시절을 생각해보면 어찌 그리 많이 싸웠나 이해가 안갈 지경이다. 맨날 내가 지적질하고 상대는 반항하는 것의 도돌이표를 그리다가 끝내 비참하게 끝을 맺은 연애도 있었다. 나는 그때 왜 그렇게 지적질을 많이 했던가? 그러는 나는 완벽했었나? 절대로 그렇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오히려 그 시절 나는 가시나무처럼 뾰족한 사람이었다. 온통 흑역사로 기억되는 나의 젊은 시절 연애를 생각해보면 지금 이런 관대함을 가지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깝다. 무수한 홀로 섦의 시간들 속에서 터득한 지혜와 감사의 미덕이 나를 이렇게 변화시켰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쓸모없이 소비돼 버리는 경험은 정말 없는 것 같다. 모두 세월이 지나고 나면 어느 만큼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살면서 거듭 경험한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과 살면서 자존심이 무슨 소용 있을까 싶다. 자존심은 배우자에게 부리라고 있는게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요령 있게 말로 설득해서 얻어내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은 그냥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 말해도 못 고치는 것은 남편이 그만한 능력이 없거나 성격이나 습관이 나와 달라서 못 고치는 것일 뿐 나를 우습게 알아서 그런게 아니니 괜히 자존심을 거기에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다르다. 자존감 있는 사람은 상대의 반응에 편안하게 반응한다. 괜한 자존심이 불쑥불쑥 튀어나오지 않는다.
나는 결혼을 하며 남편과 이렇게 약속했다. 정말로 너무나 거슬려서 우리 관계를 위협할 정도의 사안이라면 서로 정식으로 꼭 얘기할 것, 그렇게 상대가 진지하게 요구한 것은 고칠 것, 혹시 노력해도 고치기 어려운 경우에는 대안적인 방식으로라도 고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꼭 보여줄 것, 그 외의 사소한 것들은 그냥 서로 봐주자고 약속했다. 그래서인지 결혼 후 나는 남편과 크게 감정이 타들어가는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 결혼 직후 우리 관계에서 가장 어렵고 예민한 문제인 남편의 자녀 문제로 한번 심각하게 싸움 비슷한 날선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 일 직후 남편이 내가 원하는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꽤 내 입장을 반영하여 변화된 행동을 보여주었고 나 역시 내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부모역할의 어려움을 생각해 되도록 자녀문제는 건드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도움을 요청하면 내가 할수 있는 만큼 성심성의껏 도와주되 일부러 나서지는 않기로 하고 나니 나도 편해졌다.
아마도 우리 부부 외에도 나이 들어 결혼한 커플의 경우는 비슷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하고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한살 많은 선배도 아홉 살 많은 이혼 경력이 있는 분이랑 다소의 밀당 끝에 결혼했는데, 그 부부도 우리 부부 못지않게 편안하고 행복하게 산다. 나이가 주는 지혜가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상당 부분 방어해준다는 사실을 그 선배를 통해서도 확인하게 된다.
늦게 결혼해서 좋은 것 중의 하나가 시댁 식구들에 대해 서로 적당한 관심과 무관심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젊을 때 결혼한 경우엔 아무래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어른들 보기에 시원찮아 보여서 이것저것 가르친답시고 훈계를 하고 결혼생활에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시부모가 아직 젊고 능력이 있어서 그 팔팔한 힘으로 이것저것 챙겨주기도 하고 간섭도 한다. 결혼한 여자 입장에서는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나이에 결혼해 남편과의 룸메이트 생활에도 적응해야 하고, 애를 낳으면 엄마라는 어마어마한 역할에도 적응하기도 버거운데, 여기에 시댁 식구들까지 신경쓰다 보면 정말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안들 수 없다.
시댁은 아무리 잘해줘도 부담스러운 존재이다. 해서 서로 적당한 간격이 중요한데(무관심도 좋고) 중년에 결혼을 하면 일단 시부모님이 이미 연세가 많이 드셨기 때문에 이래라저래라 할 기운이 없다. 그리고 그 나이면 자식으로부터 도움이 필요한 처지가 된 경우가 많아서 자식 눈치를 많이 보게 된다. 자신의 딸이 아닌 며느리, 그것도 안지 얼마 안되는 며느리에게 스스럼없이 할 말 다하고 낯 두껍게 요구하는 시부모는 별로 없을 듯하다. 그저 나이 든 자신의 아들을 이제라도 데려가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더 많이 하신다. 남편의 형제들도 비슷하다. 모두 서로의 경계를 지키는 예의가 있을 나이들이라서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늦은 나이에 결혼하면 시댁 스트레스가 거의 없어서 편하다는 큰 장점이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결혼생활에 활력이면서 최대한의 도전이기도 한 출산과 양육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 사실 요즘 젊은 층이 결혼하기 싫은 이유의 대부분이 치솟은 집값과 자녀 교육에 인생 저당 잡히기 싫어서가 아닌가? 나이가 들어 결혼하면 출산할 일도 (거의) 없고 둘이서 잘 살면 된다. 물론 나같은 경우는 남편에게 두명의 자녀들이 있고 이들이 아직 완전한 독립을 하지 못하고 학업 중인 상태이기에 자녀가 주는 부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애들도 독립이 머지 않은 나이이고 무엇보다 남편이 아내에게 양육부담을 전가하고자 결혼한 경우가 아니라면 서로 상의하여 얼마든지 조율하며 잘 지낼수 있다.
마지막으로 나이 들어 결혼해서 좋은 점은 아무래도 중년이 되면 젊은 시절에 비해 수입이 넉넉해진 둘이 만나는 것이기에 비교적 돈 걱정 없이 여행이며 맛집 투어며, 하고 싶은 것들을 부담 없이 시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혼자 버는 것과 둘이 버는 것의 수준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두명분의 수입으로 보다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살수 있다.
오늘날 결혼은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도 무거운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그들에게 조언하고 싶다. 나이가 들면 결혼이 그렇게까지는 무거운 것이 아니게 된다고... 그게 정말인지 나이가 들어 결혼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한번 진지하게 들어보라고 진심 조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