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연고도 없이 서울이라는 큰 도시로 올라온 나는, 대학교 입학 후 2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 생활을 하는 것보다 훨씬 비용이 덜 들어가고 (학교 인근의 하숙비 시세와 비교하면 공짜 수준) 학교 캠퍼스 안에 위치하고 있으니 수업에 참여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그러니, 당연히 기숙사를 들어가고자 하는 학생들의 숫자는 많았고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아 경쟁률이 상당했다. 국립대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그보다 더 기숙사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나 할까?
지방에서 올라온 1학년 신입생들의 경우엔, 기숙사 입주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아서 기숙사 학생들의 대부분은 1학년이 차지했다. 2학년부터는, 성적순으로 기숙사 입주의 기회를 부여하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기숙사라는 환경에서 살아본 경험이 나에게 더없이 소중하고 유익했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다시는 못 올 파릇파릇 어린 날의 기억들과,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 꽉 차 있던 그 공기의 색감들.
그 모든 기억과 경험들 속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기숙사에서 만났었던 친구들, 언니들과의 추억이다. 2인 1실의 방 구조였기 때문에 룸메이트와의 원만한 관계가 1년이라는 기숙사 생활의 퀄리티를 좌우하게 된다. 다행히도 나는 룸메이트뿐만 아니라 맞은편 방, 옆 방 모두 성격 좋은 친구들, 언니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다들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그 학교에 들어갈 정도로 성실히 공부하지도 못했을 듯).
2년 간의 기숙사 생활을 마친 후 나에게 남은 것은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로부터 얻은 소중한 조언들이었다.
보고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나처럼 부족한 사람에게 조언들을 아끼지 않는 (따뜻한 조언이든 따끔한 조언이든), 자신이 아는 것을 나눠주는 사람들 (체질적으로 다들 선생님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보다 더 선배 학년이거나 대학원생이거나 혹은 학번은 같아도 3 수생이었던 언니들은 마치 나를 친동생처럼 잘 대해 주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잔소리도 많이 해 주셨다.
그들의 눈에 어린 내가 얼마나 미흡해 보였겠는가? 안타까운 마음에, 혹은 더 열심히 살라는 마음에 때로는 선생님같이, 때로는 엄마같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지혜와 주옥같은 조언들을 마구 쏟아 내셨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말씀을 잘 들어주는 태도를 보이며 나의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물론, 그 조언의 깊이를 그때는 몰랐었고, 지금에 와서야 이해되는 것들이 많다).
타인에게 잔소리 혹은 조언을 하는 것, 이것은 친절함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잔소리를 하는 사람도, 그 잔소리를 감사히 들어주는 사람도, 우리가 사는 삶을 혹은 주위의 사람을 더 나아지게 만들겠다는 자세와 태도가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들의 좋은 점을 더 흡수하고 더 배웠어야 했는데, 어렸고 속이 좁았던 나는 나만의 아집과 청춘의 방황으로 마음의 눈을 조금만 연 채, 언니들의 조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아둔하게도.
삶을 살아보니, 언니들의 이야기는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고 그들의 조언들은 내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항상 곱씹어 보는 화두가 되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기숙사 생활 내내 선배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들의 조언을 마음 기쁘게 받아들여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텐데……. 시간은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 버렸고, 세월의 물결을 타고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흘러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