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은 오랜만에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난다. 교대근무가 비번인 날 아침 그녀는 노래를 틀고 퍼즐을 맞추고 있다. 절반 정도 맞추고 한 동안 바빠서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퍼즐 그림은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다.
그림 좌측에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전통적으로 죽음과 애도를 상징한다. 동시에 하늘을 향해 곧고 뾰족하게 자라는 상록수로서 단단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죽음과 생명을 함께 담고 있는 나무가 그림 속에서 어딘가 모르게 일그러져 울렁인다. 별과 달도 소용돌이 속에서 반짝인다.
재인은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이 드는 이 그림을 좋아한다. 한참 아무 생각 없이 퍼즐을 맞추다가 일어서서 방문을 열고 나간다. 거실에서 마늘을 다듬던 엄마가 재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오늘 정희 이모랑 만나신다 하셨죠.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저도 오늘 준영 오빠 연차 내서 같이 데이트하기로 했어요.”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칼을 한 자루 들고 엄마 옆에 앉아 같이 마늘을 다듬기 시작한다.
“이거 얼마 되지도 않는데. 엄마가 혼자 천천히 하면 돼.”
“같이 하면 더 빨리 끝나잖아요. 내가 또 마늘 하나는 잘 까니까 걱정을 하지 마셔.”
엄마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는다.
“요즘, 준영이랑 잘 지내?”
“응, 엄마. 오늘 오빠랑 맛집도 가고 뮤지컬 보고 놀기로 했어.”
“좋겠네.”
“좋지, 그럼.”
엄마가 재인이를 보고 놀리는 투로 말한다.
“피임도 잘하고. 하하.”
“아, 엄마 날 어떻게 보고. 내가 이래 봬도 그쪽으로는 아주 빠삭해. 성에 눈 뜬 지 벌써 15년이 다 되어 가는 전문가라고요. 걱정을 하지 마요.”
“얼씨구, 잘났다. 그래. 대단하다. 대단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엄마는 아마 깜짝 놀랄 거야.”
“그래, 퍽이나. 글로만 배운 거 아니고?”
재인은 늘 그렇듯 엄마와 인생에 피도 살도 되지 않을 말장난 배틀을 벌인다.
***
재인은 집 앞에 서있는 검은색 승용차에 올라탄다.
“오빠, 일찍 왔네? 이제 날씨가 제법 추워.”
“어서 타. 차 안은 따뜻할 거야.”
준영은 운전을 하면서 재인에게 말을 건넨다.
“오늘, 예쁘게 입고 왔네?”
“그래? 오늘 힘 좀 줬지. 오랜만에 하루종일 데이트하는데 그냥 나올 수 없지.”
“하하.”
“아, 오빠. 근데 그 뮤지컬 어떻게 예매했어? 그거 티켓팅 엄청 어렵다던데.”
“완전 대기 타서 얻어냈지.”
“최고야. 나 진짜 그 뮤지컬 보고 싶었거든.”
준영이가 피식 웃으면서 말한다.
“너 오늘도 또 보다가 자는 거 아냐?”
“아, 오빠!”
“하하. 알겠어. 근데 너 진짜 또 잘 거잖아.”
“아, 오늘은 내가 눈 뜨고 있어 볼게. 헤헤.”
재인도 웃으면서 대화를 이어간다.
“오빠, 근데 나는 왜 이렇게 공연 같은 걸 보면 잠이 오지? 나도 좀 고상하게 즐기고 싶은데. 저번에 오빠가 국립발레단 공연 보여줬을 때도 사실 나 거의 초반부터 잤어. 내가 확실히 교양이랑은 거리가 먼가 봐. 스토리가 잘 이해가 안 가. 그냥 뭐랄까. 깜깜하고 노래도 흘러나오고 딱 자기 좋은 분위기랄까.”
“잘났다. 우리 재인이 아주 대단해.”
준영은 재인이 귀엽다는 듯이 말한다.
“그럼, 일단 점심부터 먹으러 가자.”
“좋아.”
***
재인이 칼국수 면발을 맛있게 후루룩 먹는다. 준영도 재인이 먹는 걸 보고 국물을 맛본다.
“재인아. 어때, 맛있어?”
“와, 오빠 너무 맛있어. 여기 어떻게 찾았어?”
“내가 아버지랑 어릴 때부터 자주 오는 곳이야. 재인이 너랑도 계속 한 번 와야지 하다가 못 왔었는데. 오늘 드디어 같이 오네. 날씨도 쌀쌀하니 딱 좋다.”
준영은 재인이 먹는 걸 흐뭇하게 바라본다.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에 온몸이 녹는다. 식사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데 재인의 직장 팀장인 민석과 누리봄 동네책방 사장 진욱과 마주친다. 재인은 놀라며 인사한다.
“팀장님!”
“오, 재인씨. 여기서 다 보네.”
“그러니까요. 그런데 옆에 분은…”
“아, 나는 사촌동생이랑 칼국수 먹으러 왔지.”
진욱이 재인에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재인도 놀란 듯 인사한다. 민석도 당황한 듯 묻는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진욱과 재인이 민석을 번갈아 보며 거의 동시에 말한다.
“책방에서…”
“동네 책방…”
진욱이 웃으면서 말을 잇는다.
“아, 형. 그게 내가 운영하는 책방에 자주 들르는 손님이셔.”
준영은 어색한 듯 옆에 서있다. 민석은 준영에게 말을 건다.
“안녕하세요. 저는 재인씨 직장 동료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재인이 그 침묵을 깬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저희는 이제 가보겠습니다.”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재인과 준영은 주차장으로 걸어가서 차에 올라탄다. 준영은 시동을 켜고 약간 신경 쓰이는 듯 아무 말이 없다. 재인은 눈치도 없이 신나서 입을 연다.
“우와, 진짜 신기하네. 그분이 팀장님 사촌동생이시구나.”
“...”
“어떻게 여기서 딱 만나지. 신기하다. 안 그래, 오빠?”
“그러네…”
준영은 대화의 흐름을 돌린다.
“재인아, 뮤지컬 두 시간 넘게 남았는데 그동안 뭐 할까.”
“음… 우리 그럼 카페 들어가서 차나 한 잔 마시자.”
“그래, 그럼 일단 공연장 근처로 가자.”
***
카페 안에서 준영과 재인이 마주 앉아 있다. 재인은 뜨거운 커피를 입으로 후 불어 한 모금 마신다. 준영도 따뜻한 찻잔을 들어 한 입 마신다. 준영은 뜸을 들이다 재인을 쳐다본다.
“재인아, 너는 힘든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풀어?”
“나? 음… 나는 그냥 속으로 좀 삭히는 편이야.”
“그렇구나.”
“왜, 오빠?”
준영이 찻잔을 내려놓는다.
“아니, 그냥… 재인이 네가 나한테 힘든 걸 표현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가끔 재인이 너 보면 분명 힘든 게 보일 때가 있는데… 나한테 속내는 잘 드러내지 않는 것 같아.”
“아… 내가 좀 그런 편이야… 만약에 말을 해서 해결되는 일이라면 말을 하겠지만, 말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그냥 혼자 생각하는 게 편해서.”
“그렇구나… 그래도 가끔은 나한테도 이야기해 주면 더 좋을 거 같아.”
재인은 미안한 듯 준영을 쳐다본다.
“오빠, 서운했어?”
“아니, 서운한 건 아닌데. 그냥 네가 뭔가 걱정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내가 옆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니까 아쉽기는 하지. 사실 그럴 때는 같이 있어도 조금 허전한 느낌이 들어.”
재인은 잠깐 생각에 잠긴다. 이내 말문을 연다.
“그럴 수도 있겠다. 미안해… 거기까지는 내가 생각을 못했어… 요즘 내가 좀 힘들기는 했어… 오빠 말이 맞아… 그리고 아마 올 연말까지도 힘든 일이 계속 더 있을 거 같아… 그런데 나도 일일이 다 말하다 보면 더 힘들어지는 부분이 있어서… 오빠는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빠랑 만나면서 오빠를 정말 많이 의지하고 있어… 물론 말로 모든 걸 설명하지는 않아도… 오빠가 그냥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돼…”
준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 부분은 그냥 서로 성향이 조금 다른 것 같아. 말해줘서 고마워. 나는 너랑 대화를 하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위로도 받으니까… 너 역시도 나한테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어. 그래도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