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재인은 109호 빈소에 가서 유가족에게 입관 일정을 안내한다.
“오늘 오전 11시에 입관식 진행할 예정입니다. 우선 그전에 오시는 조문객분들 인사받고 계시면 제가 시간 맞춰서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녀는 인사를 간단히 하고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 빈소의 제단 주변을 정돈한다. 흐트러진 향로 위치를 조정하고 남은 향도 충분한지 확인한다. 그리고 헌화 항아리 주변에 떨어진 꽃잎들도 직접 손으로 줍는다.
그녀가 신발을 신고 나서려는데 그 사이 빈소 안으로 한 중년 남성이 들어선다. 검은 양복 차림에 한 손에는 검은 클러치백을 들고 있다.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그는 말없이 향을 한 대 꺼내 불을 붙인 후 향로에 꽂는다. 그리고 어두운 저음으로 유가족에게 인사를 건넨다. 정중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 위협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래도 우리는 앞으로 계속 얼굴 볼 일 많을 겁니다. 그럼, 또 봅시다.”
유가족은 아무 말 없이 서있다. 남성은 그 말만 남긴 채 빈소를 다시 빠져나간다. 재인도 조용히 사무실로 발길을 돌린다. 그녀는 궁금하다. 이번엔 또 누구였을까. 장례식장에는 가끔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도 찾아온다.
고인이 남기고 간 빚을 받겠다고 찾아온 사채업자, 펑펑 울다가 쫓겨난 내연남, 음주운전으로 고인을 사망에 이르게 한 죄책감으로 유가족이 원치도 않는 사과를 하러 온 가해자, 장례 기간 내내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다가 마지막 날 아침 술에 한껏 취해 고주망태가 되어 온 남편까지 다양하다.
재인은 장례지도사로 일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을 많이 목격한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죽음 중 최고의 죽음은 뒤탈 없는 죽음이라는 점이다. 유가족들이 후회나 원망 또는 자책을 하기보다는 조각나지 않은 온전한 마음으로 고인을 애도할 수 있는 죽음은 감히 말하는데 복 받은 죽음이다.
사무실로 돌아온 재인은 미영의 자리로 다가가 말한다.
“팀장님, 오늘 입관 일정이 11시인데 지금 9시 조금 안 됐어요.”
“안 그래도 재인씨 오면 같이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지금 바로 입관실 갑시다.”
***
구내식당에서 재인은 미영과 진한 그리고 혜영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미영이 묻는다.
“진한씨랑 혜영씨, 일 배우는 건 어때요?”
진한이 먼저 대답한다.
“선배님들께서 많이 알려주셔서 잘 배우고 있습니다.”
혜영도 옅은 미소를 띠며 답한다.
“아직 부족한 게 많지만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미영이 식사를 하면서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재인을 본다.
“재인씨가 잘 알려주고 있나 보네요.”
“아니에요. 혜영씨랑 진한씨가 잘 따라와 줘서 고맙죠 저는.”
미영은 다시 묻는다.
“그런데, 어떻게 고등학생 때부터 진로를 이쪽으로 결정하게 됐어요? 나는 원래 30대 초반까지는 다른 일을 했거든요. 장례지도학과가 생긴 지도 얼마 안 된 걸로 알고 있는데.”
혜영이 먹던 음식을 삼키고 대답한다.
“아… 저는 고등학생 때 어떤 다큐를 봤는데, 거기서 이 직업을 알게 됐어요. 그때 다큐에 나오셨던 장례지도사님은 사명감이 엄청 넘쳐 보이셨는데, 사실 저는 아직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래도 제대로 배우고 익혀서 보람 느끼며 일하고 싶어요.”
진한도 말을 잇는다.
“저는 사실 아버지께서 장례지도사세요. 그래서 아버지는 제가 이 직업을 갖는 걸 지금도 반대하고 계세요. 저는 아버지를 늘 존경해 왔고,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제가 그 길을 따라간다고 하니 아버지는 속이 상하신가 봐요.”
미영이 대견한 듯 말한다.
“혜영씨랑 진한씨는 그래도 대단한 거예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건. 그리고 진한씨 아버지께서도 아마 나중에는 많이 응원해 주실 거예요. 이 일이 보람을 느낄 수는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편견을 많이 가지는 직업이라… 자식은 그 시선을 안 받게 하고 싶으신 것, 그뿐일 거예요.”
***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재인은 침대에 누워 준영에게 전화를 건다. 연결이 안 된다. 조금 뒤 준영에게 전화가 온다.
“여보세요?”
“응, 재인아. 나 야근해서 이제 집 가는 중이야.”
“그랬구나, 오빠도 피곤하겠다. 지금 바로 통화 안 해도 돼.”
준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냐, 나도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어. 우리 내일 일찍 잠깐 볼까? 할 이야기도 있고.”
“응, 좋아. 나도 오빠한테 말할 거 있어. 근데 오늘 늦게 퇴근했는데 안 피곤하겠어? 어차피 내일 토요일인데 오빠 늦잠 좀 푹 자다가 오후에 봐도 난 좋아.”
“난 괜찮아. 그럼 내일 오전에 내가 집 앞으로 갈게.”
“응, 오빠 그럼 내일 봐. 사랑해.”
재인은 전화를 끊고 생각한다. 내일은 준영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줘야겠다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내일 아침 해가 뜨고 만나서 말하고 싶은 대로 그리고 또 생각나는 대로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막상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혹시나 준영이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지 여전히 걱정도 된다.
***
재인은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간단히 단장을 하고 방을 나온다. 아빠가 웃으면서 말한다.
“아침부터 어디가?”
“응, 아빠 나 지금 준영 오빠 근처에 와 있대서.”
“아침부터 공사가 다망하네, 우리 딸.”
엄마도 재인을 보며 웃는다.
“잘 다녀와. 그런데 날도 추운데 잠깐 들어오라고 하지. 계속 밖에서 기다린 거야?”
“아니, 여기 앞 카페에 들어가 있대요. 일단 다녀올게요.”
재인은 기분이 좋은 듯 얼굴이 살짝 상기된 채 현관문을 나선다. 동네 자그마한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안에는 이미 준영이 도착해 앉아 있다.
“오빠!”
“응, 재인아. 뭐 마실래.”
준영은 의자에서 일어난다. 재인은 준영을 다시 앉히며 말한다.
“아냐 오빠 내가 주문하고 올게. 오빠 뭐 마실래. 아침부터 오느라 힘들었지.”
“그럼, 나는 시원한 아메리카노로 먹을게. 고마워.”
“차가운 걸로? 안 춥겠어?”
“응, 괜찮아.”
재인은 웃으면서 준영을 본다.
“오빠 그럼 빵도 좀 시켜올까? 아침은 먹고 왔어?”
“아니, 괜찮아.”
“알겠어, 그럼 내가 일단 주문부터 하고 올게.”
조금 뒤 재인은 커피 두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온다. 준영은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빨대로 쭉 빨아 마시고는 재인의 커피 잔 쪽으로 시선을 둔다.
재인도 따뜻한 커피를 한 입 마신다.
“오빠, 내가 있잖아…”
재인과 거의 동시에 입을 연 준영의 목소리가 재인의 흐려진 말끝을 덮는다.
“재인아, 우리 여기서 그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