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정산 테이블에서 재인이 업무를 보고 있다. 그 앞에는 50대 부부가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재인이 영수증을 내민다.
“네, 완료됐습니다. 한 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남성은 눈으로 얼핏 보고는 아내와 함께 일어선다. 재인은 문 앞까지 배웅한다.
아내는 양손으로 재인의 손을 꼭 움켜 잡는다.
“신경 써주신 덕분에 장례 잘 치를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재인은 고개를 숙이며 답한다.
“아닙니다. 제가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가끔 재인은 유가족에게 인사를 받는다. 아주 가끔이지만 이럴 때는 마음속 깊이 보람을 느낀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이 직업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나이까지 어린 재인을 못 미더워하며 다른 장례지도사로 바꿔달라는 유가족들의 불평도 듣곤 한다.
가뭄에 비 오듯 듣는 인사라 그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온다. 인사를 마치고 데스크로 돌아와서는 정산한 돈뭉치를 정리한다. 그러던 중 휴대폰 문자 알림이 울린다. 민아다.
띠링.
‘재인아 그럼 내가 내일 오후 2시까지 누리봄 책방으로 갈게.’
***
재인은 책방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 거린다. 며칠 전 준영에게 보낸 메시지에는 여전히 아무런 답이 없다. 한숨을 작게 내쉰다. 곧이어 책방 문이 열린다.
“재인아!”
민아가 손을 흔들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온다. 언제나 그렇듯 환하게 웃고 있는 민아다.
“재인아, 뭐 마실래. 내가 살게.”
“사긴 뭘 사. 일단 주문하러 가자.”
둘은 카운터로 간다. 재인이 민아에게 묻는다.
“뭐 마실래. 우리 동네까지 와줬는데 내가 사야지! 빨리 메뉴나 골라.”
“알았어. 그럼 난 따뜻한 녹차라테 먹을래.”
“케이크나 빵은?”
“아니, 괜찮아.”
재인이 진욱에게 카드를 내민다.
“따뜻한 카페라테랑 녹차라테 한 잔씩 주세요.”
“네. 9,600원 결제하겠습니다. 메뉴는 준비해서 가져다 드릴게요.”
재인은 카드를 건네받고 민아와 자리로 돌아간다.
“재인아, 이제 진짜 겨울 날씨야. 으으. 춥다.”
“그렇지, 갑자기 많이 추워졌어.”
“내가 이 추위를 뚫고 널 보려고 여기까지 왔어. 어때, 나 좀 괜찮은 친구지?”
“당연하지. 민아야, 사실 나 얼마 전에 오빠한테 연락했다…”
민아가 큰 소리로 되묻는다.
“진짜?”
민아는 자신의 소리가 컸다는 걸 인지하고는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그리고 뒤늦게 입을 가리며 다시 조용히 묻는다.
“진짜?”
그 사이 진욱이 메뉴를 테이블로 가져온다.
“맛있게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욱은 다시 주문대로 돌아가고, 재인이 말한다.
“응…”
“뭐라고 연락했어.”
“나, 힘들다고…”
“뭐래…”
“답이 없어… 아직도…”
민아가 한숨을 내쉬며 녹차라테를 한 모금 마신다.
“야… 진짜 매정하다, 매정해. 재인이 너 많이 속상했겠다.”
“그냥… 나도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어… 보고 싶은 건지… 아쉬운 건지… 어쨌든 계속 생각이 나…”
“그래… 그리고 아직 헤어진 지 얼마 안 돼서 더 그럴 거야.”
“응, 그런 것 같아. 그리고 엄마 아빠는 아직 모르셔.”
민아는 다시 미간을 살짝 웅크리며 재인을 본다.
“모르시는구나…”
“응, 내가 오빠한테도 당분간 부모님께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어… 아빠끼리 친구셔서… 내가 미리 부탁했어… 혹시라도 아빠 아시면 걱정하실 거 같아서… 그리고 엄마 일도 있고… 엄마가 나 잘 지내는 모습만 보다 가시면 좋겠어…”
재인이 눈에 초점 없이 고개를 내리고 커피잔을 양손으로 잡는다.
“재인아…”
“아무튼 그래 요즘. 내가 우울한 이야기만 했지?”
“무슨.”
“민아야 너는 지난번에 소개팅한 건 어땠어?”
“아… 조금 더 만나보고는 있어.”
재인이 웃으면서 민아를 바라본다.
“오. 그럼 잘 돼 가는 거 아니야?”
“에이, 아직 잘 몰라.”
“모르기는 무슨. 고민아! 올해 가기 전에 성공했네. 이제 옆구리 안 시리겠다?”
“나는 마음에 드는데, 그 사람은 아직 어떤지 잘 모르겠어.”
“음… 아무래도 잘 될 것 같은데. 오늘 내가 커피 살 필요가 없었네. 좋은 일 있는 너한테 얻어먹을 걸 그랬다.”
재인의 웃는 모습에 민아도 긴장이 한결 풀린다.
“재인아… 그리고 이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응, 말해.”
“있잖아… 내가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잘 모르겠어서 그런데…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하면 힘이 될 수 있을까?”
“응?”
“아니…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너한테 힘이 돼주고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민아가 우물쭈물한다. 재인이 입가에 미소를 띤다.
“민아야.”
“응?”
“나는 네가 그냥 이렇게 가끔 만나서 내 이야기 들어주는 걸로도 충분해. 내가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하겠어. 그냥 속내 다 털어놓을 사람이 지금은 제일 필요한데. 그걸 네가 이미 해주고 있어.”
“에이, 내가 하는 게 뭐가 있어.”
“진짜야.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참, 그리고 민아야 너 말이 맞기는 하더라.”
민아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뭐가?”
“그 서비스 말이야.”
“응.”
“아직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꽤 있더라.”
“거 봐, 내 말이 맞지?”
재인이 커피를 한 모금하고 다시 대화를 잇는다.
“응, 아직도 게시판에 글이 계속 올라오더라고.”
“그럼, 계속 더 해보는 건 어때?”
“근데,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
“왜?”
“음… 그때 갑자기 관심받을 때 힘들었던 기억이 남아있기도 하고… 그리고… 또 지금 다시 상황을 바꾸기에는 엄마 일도 있고… 아무튼 조금 더 생각은 해보려고…”
민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재인아. 뭐든 너 마음 가는 대로 해. 그게 제일 나아. 그리고 내가 선 넘는 말도 조금 할게.”
“뭔데?”
“재인아 있잖아.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는 거… 그거 쉬운 일 아니야. 그런데 또 살면 살아져.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 재한이 하늘나라로 갔을 때 말이야, 그때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위로를 한 사람들이 있었거든… 그때는 그 말이 진짜 듣기 싫었어. 뭘 모르고 하는 소리 같았거든. 근데 그 말이 맞더라. 나는 그냥 앞으로도 너 옆에 있을게. 네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냥 너 옆에 있을게.”
재인과 민아의 눈시울이 같이 붉어진다. 그러고 나서도 둘은 한참 더 이야기를 나눈다. 그 사이 진욱은 다른 테이블을 닦으면서, 흐트러진 책들을 정리하면서 그리고 다른 손님의 음료를 가져다주면서 재인이 앉은 좌석을 계속 스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