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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안 Oct 15. 2023

#35 첫눈

소설 연재


재인은 방 책꽂이에서 연갈색 앨범을 한 권 꺼낸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가족과의 추억이 담겨있다. 매달 1장 1년에 12장씩 사진을 인화해서 보관해 왔다. 그녀는 지난달 여행에서 촬영한 사진을 새롭게 추가한다.


재인의 일상은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간다. 준영과 헤어진 일상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고 엄마와의 이별도 준비하고 있다. 오늘은 엄마와 함께하는 마지막 가족 여행이다. 12월 10일이 되기까지 3일밖에 남지 않았다.


여행지로 떠나는 차 안에는 ‘가로수 그늘아래 서면’이라는 노래가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얘기 우 우 여위어 가는 가로수 그늘 밑 그 향기 더 하는데 우 우 아름다운 세상 너는 알았지 내가 사랑한 모습 우 우 저 별이 지는 가로수 하늘 밑 그 향기 더 하는데 내가 사랑한 그대는 아나.”


엄마가 입을 연다.

“엄마는 이 노래가 참 좋아. 뭔가 따뜻하면서도 신나고 또 한편으로는 몽글몽글하고…”


창밖을 보고 있던 재인이 조금 뒤 놀라며 말한다.

“와, 밖에 눈 와요!”


아빠와 엄마도 말을 잇는다.

“그러네, 올해 첫눈이네.”

“너무 좋다. 분위기도 더 느낌 있.”


눈 내리는 바깥 풍경을 감싸 안듯 노래도 계속 흘러나온다. 한참을 더 달린 후 목적지에 도착한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숲 속 나무길이다. 바로 옆에는 자연과 전혀 이질감 없는 펜션이 보인다. 모두 차에서 내려 짐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간다.


재인이 제일 먼저 창가로 간다.

“아빠, 엄마 여기 숙소 너무 예요. 통창문이라 바깥도 잘 보여요.”


엄마도 짐을 내려놓고 재인 옆으로 간다.

“그러네. 역시 우리 재인이가 숙소 하나는 참 잘 골라. 이번에도 대성공이네.”


아빠는 재인과 엄마를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짐을 정리하며 말한다.

“그럼 일단 짐만 풀고 여기 앞에 산책부터 조금 하고 다시 들어올까?”


모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재인은 가족과 함께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뽀드득뽀드득 밟으면서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한다. 하루종일 맛있는 음식 먹고, 온돌방에 누워 귤도 까먹으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늦은 저녁이 되고 아빠는 피곤한지 일찍 잠에 든다. 재인은 엄마와 거실 통유리 앞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바깥은 새까만 밤하늘에 크고 작은 수많은 별들이 나무 사이로 반짝이고 있다.


재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여전히 엄마에게 애교를 부리며 장난도 친다. 그렇게 새벽까지 모녀의 수다스러운 대화가 이어진다.


그러다 엄마가 갑자기 재인을 지긋이 쳐다본다.

“재인아, 엄마… 이제 얼마 안 남은 거지?”


재인은 당황한 기색을 최대한 내비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엄마를 쳐다본다.

“응? 엄마, 뭐가요?”


엄마는 재차 묻는다.

“엄마한테 시간이 이제 얼마 안 남은 거 맞지, 재인아?”


재인은 더 이상 표정관리를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있다. 엄마는 작게 미소를 띠며 재인을 한 번 본 후 다시 유리창 밖을 쳐다본다.


“재인아, 사실 엄마 알고 있었어… 솔직히 엄마는 네가 아주 어릴 때는 이해를 못 했어…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또 어떤 걸 볼 수 있는지… 그런데 나중에 알고 나서는 너한테 너무 미안했어… 그동안 혼자 속앓이 많이 했지?

“엄마… 그걸… 어떻게…”

“재인아, 엄마는 너한테 고마운 게 참 많아… 너 덕분에 외할머니랑 마지막 인사도 할 수 있었고 지금은 이렇게 너랑도 제대로 얼굴 마주하고 인사할 수 있잖아…”


재인도 계속 말끝을 흐린다.


“엄마…”

“재인아… 엄마는 네가 원한다면 그 일 다시 해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아. 그 프로그램이 방송된 이후에 네가 혼자 상처 많이 받을 거 같아 속도 상했어… 그렇지만 반대로 도움 받은 사람도 많을 거야. 그리고 그 일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재인이 네가 그 서비스 운영할 때 마음이 정말 편해 보였어.”

“…”

“엄마가 후회되는 게 하나 있어… 조금 더 일찍 너랑 이런 대화를 해볼걸… 그런 생각… 그런데 엄마도 용기를 내지 못했어… 네가 다른 사람과 다른 능력이 있다는 걸 엄마가 너무 늦게 알았거든… 그래서 엄마가 떠날 날을 이미 알고 있는 너 마음도 힘들 텐데… 그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걸 네가 알면 더 힘들까 봐…”


재인은 눈물을 흘린다.

“엄마… 나 사실 무서워… 엄마 없으면 나 어떡해…”


엄마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재인을 꼭 끌어안는다.

“재인아…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는 그동안 많 추억 만들었잖아… 엄마 보고 싶을 때는 앞으로 그 기억들 하나씩 꺼내보면 돼… 할 수 있지? 엄마도 재인이랑 아빠랑 함께 했던 기억들 다 가지고 갈 거야… 하나도 빠짐없이…”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엄마는 다시 말을 잇는다.

“그리고… 엄마 가고 나면… 아빠도 아마 많이 힘들어하실 거야… 그런데 재인이 네가 아빠의 슬픔까지 혼자 다 끌어 안으려고는 너무 애쓰지 마… 그러면 오히려 서로 더 지칠 거야… 아빠는 또 아빠가 가진 힘이 있으니까 아빠 나름대로 천천히 잘 이겨내실 거야… 그러니까 재인이 너도 엄마 떠나고 나면 아빠만 챙기지 말고 너 마음부터 잘 챙겨. 알겠지? 대신 엄마 충분히 많이 그리워해 줘… 엄마는 재인이가 엄마를 그렇게 보내주면 좋겠어… 사랑하고 고맙다, 내 딸. 우리 재인이… 그리고 엄마는 하늘나라 가서도 재인이 계속 지켜볼 거고 가 뭘 하든 응원하고 있을 거야…”


며칠 뒤 한울병원 장례식장 105호 빈소 입구에는 ‘故 최정인 님’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안쪽 제단에는 재인의 엄마가 검은색 액자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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